기억의 풍경

 

망각은 인간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모든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면 부끄러움과 슬픔, 또 분노로 인해 우리의 삶은 하루도 편안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 또한 인간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내가 나일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일 수 있도록 정체성의 원천이 되어 주고, 더 사랑하고 더 나눌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이별이 잦은 늦가을, 잊고 지낸 우리의 기억 속 풍경들을 가만가만 들추어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개미요정의 선물』

신선미 글·그림|창비|2020년|40쪽

엄마와 할머니는 빛바랜 사진첩을 봅니다. 사진 속 할머니는 젊고 예쁩니다. 그땐 일하느라 바빠서 어린 딸을 많이 못 안아준 할머니는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그런 할머니를 위로해 주고 싶은 아이에게 개미 요정은 특별한 옷을 선물합니다. 투명 장옷을 입은 엄마와 할머니는 그리운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할머니는 어릴 적 딸이 좋아하던 도시락도 챙깁니다. 이제 열두 시가 되면 마법이 시작됩니다. 똑딱…똑딱…댕 댕 댕 댕….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은 고운 선과 전통 채색화의 동양화 기법을 사용한 색감으로 우리를 감흥 시킵니다. 과거로 돌아간 어린 딸과 엄마의 상봉하는 모습은 감동을 넘어 우리를 눈물짓게 합니다. 책 속 곳곳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 상상 속 친구이자 순수한 아이의 눈에만 보인다는 개미 요정의 모습 또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시간을 거슬러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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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풍선』

제시 올리베로스 글, 다나 울프카테 그림|나린글|2019년|42쪽

표지엔 아이와 할아버지가 풍선을 가득 들고 있습니다. 아이는 조금씩 새로운 풍선을 갖게 되고, 할아버지의 풍선엔 지나온 기억이 가득합니다. 어릴 적 친구와의 추억이 담긴 노란색, 강아지 잭과의 시간 파란색, 할머니와 결혼식으로 채워진 보라색도 있습니다. 둘이 함께 가지고 있는 기억의 은색 풍선도 있습니다. 흑백으로 표현한 사람들의 모습과 대비를 이룬 색색의 풍선이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할아버지 풍선은 자꾸 하나, 둘 나무에 걸리거나 날아갑니다. 어느 날 은색 풍선마저 날아가자 아이는 왜 그랬냐고 소리칩니다. 가끔은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는 이제 더는 기억을 간직하기 싫은 걸까요? “괜찮아, 할아버지가 나눠 주신 추억을 이젠 네가 가지고 있는 거야.”라고 엄마는 말합니다.

이 책은 우리가 삶의 순간순간을 간직하며 살지만, 어느 땐 의도치 않게 잊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기억을 다시 품어준다고 말합니다. 풍선을 건네기도 때론 받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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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바닷속 집』

가토 구니오 그림|히라타 겐야 글|김인호 옮김|바다어린이|2010년|48쪽

제81회 미국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스미키노이에〉를 원작으로 한 그림책입니다.
할아버지는 바다 위에 쌓아 올린 낡은 집에서 혼자 삽니다. 자식들은 결혼해 멀리 떠났고 할머니마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마을은 바닷물이 점점 차올라 살던 집이 물속에 잠기면 잠긴 집 위에 새로 집을 짓습니다. 그 집이 또 잠기면 그 위에 또 새집을 짓습니다. 집 짓는 것이 힘들어 마을 사람들이 많이 떠나고 말지만 할아버지는 이 집에서 이사를 갈 수 없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실수로 톱과 망치를 바다로 떨어뜨리고 맙니다. 할아버지는 그 연장을 찾으러 아래로 헤엄쳐 내려가다 지난 시절의 집들을 차례로 마주하게 됩니다. 그 방문을 열 때마다 옛 기억의 풍경들이 아련히 펼쳐집니다.
가족과의 추억은 할아버지를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할아버지의 마음속엔 그들과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그리움도 따라 출렁이고, 때때로 깊은 마음속 심해를 헤엄쳐 들어가 한참씩 그들 곁에 머물다 옵니다. 그런 할아버지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가슴 켜켜이 쌓아둔 추억의 방문을 하나씩 열어젖힐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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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요안나 콘세이요 지음|백수린 옮김|목요일|2020년|96쪽

『잃어버린 영혼』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요안나 콘세이요의 작품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뒤 만든 그림책입니다. 그녀는 앙리가 혼자서 맞이한 삶의 마지막 날 하루의 흔적을 흑백사진 같은 연필화와 푸르름 짙은 색연필화로 더듬더듬 좇아갑니다.
책을 펼치면 한 손에 힘없이 열쇠를 그러쥐고 벤치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또 한 장을 넘기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떼들, 그리고 그 옆으로 꿈꾸는 듯 먼 데를 바라보고 서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뒤이어 기억 속 풍경 같은 어린 날의 모습들로부터 앙리가 삶의 마지막 날에 보고 느꼈을 창문 너머의 언덕과 들판, 숲, 푸른 안개, 그 속에서 어른거리는 아내와의 만남, 입맞춤, 날갯짓하는 소년, 새와 나뭇잎, 수레국화, 바람에 나부끼는 창문 커튼, 그리고 하나뿐인 머그 잔, 하나뿐인 접시와 스푼, 하나뿐인 뎅그런 의자가 오랜 영화 속 장면처럼 하나씩 펼쳐집니다.
앙리는 여름의 끝을 알리는 붉은 까치밥나무 열매가 자신을 닮았다고 느낍니다. 여름이 끝났다고,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앙리는 느릿한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오솔길을 걷고 마을을 돌아, 떨리는 마음으로 우체통을 열어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손에서 열쇠가 미끄러집니다. 그는 푸른 안개 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지만 집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문 아래에다 “돌아올게요.”라는 문구를 남긴 후, 벤치에 앉아 집 나무 벽에 기댄 채 자신의 온 존재를 다해 잿빛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책장을 덮고도 한동안 꼼짝을 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연필선 마다마다 외로움이 사무치고 푸른 안개와 들판엔 회한과 그리움이 절절합니다. 못다 한 얘기가 남은 것일까요? 차마 그렇게 떠나보낼 수 없었던 것일까요? 앙리는, 아니 작가는, “돌아올게요.”라는 말을 남겨 놓습니다.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이별을 해야 할지, 먹먹함과 함께 긴 물음이 가슴을 파고드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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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그림책 연구회

어른그림책연구회 – 배수경, 백화현
그림책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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