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단어도 시대의 가치 기준, 내 상황(나이를 포함한 ) 등 여러 요소로 의미나 느낌이 달라진다. 재미라는 단어는 젊은 시기보다는 노년으로 가는 지금의 나에게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맛’이라는 단어 풀이도 맘에 든다.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인생 선배인 노학자의 글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의 노년기 이야기가 재미있어, 지루하고 고단하면서도 그리 대단하지 않은 인생에서 뜻하지 않게 한가득 꼭 필요한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이제야 시간이 많은 나는 재미있게 살고 싶어, 함께 나이가 들어가는 형제들과 제주에서 한 달 살이 중 읽은 책 들이다.
1.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근후 ∣ 갤리온 ∣ 2013년 ∣ 358쪽
놀고 있으면서도 놀고 싶다는 둘째가 제목에 반해 구입한 이 책을 엄마가 읽으면 더 재미있겠다며 주었다. 그런데 나에겐 이 제목이 그리 매력적이진 않았다.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산다는 것이 너무 과해 보여서다. 하지만 책을 권한 적이 거의 없는 아들에게 소감을 말해주고 싶어 냉큼 읽었다. 그런데 재미라는 단어에 대한 내 편견을 깨고, 저자의 보석 같은 이야기가 빛나는 왕관을 선사했다. 훌륭한 저자는 이 책을 쓴 시기가 10년 전이지만, 그때 이미 지금 내 나이보다 많았고, 여기저기 불편한 몸이었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글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와 활기가 숫자인 나이나 건강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현명하고 따뜻하게 살아가는 멋진 노인이자 학자, 아버지이자 남편의 이야기로 그득하다. 인생의 굴곡이 깊다면 슬픔만큼 재미의 크기도 클 수 있고,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도 더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픈 만큼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고, 오늘을 어제의 기분으로 살지 말라 이른다. 그럴듯한 가르침이 아닌 고민하고 성찰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진솔하고 따뜻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경쟁하지 않아도 되며, 잘 쉬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자는 저자의 말이 위로된다. 좀 더 젊은 날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이런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롭고 재미있었지, 싶다.
인생은 어느 시기건 그에 걸맞은 즐거움이 있어 재미없는 나이가 없다는 저자의 말처럼 노년이 두려운 사람,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 새로운 출발점에 있는 사람 모두 정답으로 가는 과정을 알려주는 글이다. 책 뒷부분쯤에 박완서 선생님의 부고를 듣고 소회를 적으셨다. “죽음이 덜 슬퍼지려면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배려하는 노년을 살라” 노년을 일찍 생각할수록 공기보다 더 가볍고 부드러운 인생을 살 수 있음을 알려준다. 더 늙기 전에 읽어서 다행인 책이다. 해서 지금 당장 읽기를 권한다.
2.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 현대문학 ∣ 2010년 ∣ 266쪽
누군가가 나에게 한 명의 작가를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꼽는 작가가 박완서 선생님이다. 한 작가의 작품 중, 이분의 작품을 가장 많이 읽었다. 좋아서 많이 읽었다기보다는 많은 작품을 읽을수록 더 좋아할 수 있었다는 말이 더 맞다. 연배가 거의 부모님 정도 되시니, 내가 경험하지 못한 전쟁과 그 전·후의 상황이나 배경이 소설의 주요 소재임에도 글이 낯설지가 않았다. 따뜻한 눈으로 본 세상사를,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문체로 어찌나 진솔하게 표현하시는지 숨겨진 인간의 다정함을 깨우쳐 주시고, 그러면서도 냉철하게 그 시대를 알게 해주었다, 부모로, 작가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시민으로 선생님의 소회와 이야기는 세대 차이는커녕 늘 앞서가며 세상을 읽으시는 혜안으로 글이 젊고, 생생하고, 재미있다.
그런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어간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선생님의 글을 읽고, 선생님이 살아오신 시대를 경험한다. 2002년 월드컵을 소재로 쓰신 글에서는 그해 흥분되고 재미있었던 시간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처럼 선생님 나이와 인품이 드러나는 글들은 많은 생각거리와 소소한 재미를 준다. 돌아가시기 불과 6개월 전에 펴내신 이 책은 『호미』 이후에 쓴 글들을 추려 묶었다고 한다. 책 머리에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고,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도 뽐내고 싶다”고 적으셨다. 인간은 결국 가족에서 출발해서 가족 품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문구였다. 총 3부로 나누어진 글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로 시작한 1부, ‘내 인생의 밑줄’ 등, 작가로서의 삶이 따뜻하게 드러난다. 2부 ‘책들의 오솔길’은 선생님이 읽으신 책의 서평이 모여있다. 참 귀하게 읽고, 메모하고 싶었다. 마지막 3부는 선생님이 가실 길을 조금 일찍 가신 김수환 추기경. 박경리 선생님, 박수근 화백을 향한 그리움이 담긴 글들이다.
선생님 작품을 내가 많이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머리말을 모은 책(선생님 따님이 묶으셨다)에서 내가 안 읽은 너무 많은 책의 머리글이 있어 놀랐다. 머리말만 읽어도 선생님을 향한 나의 사랑과 존경에 의문을 들게 하지 않았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이리 일관되고, 여전히 따뜻하고, 수줍은, 그러면서도 단호하고 우아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신 선생님과 많은 시대를 함께한 것이 영광이고, 내 인생의 큰 재미다.
3. 『뉴욕에 살고 있습니다』
하루 ∣ 상상출판 ∣ 2022년 ∣ 251쪽
사랑하는 조카가 뉴욕에 유학하러 가기 전, 친구가 사 주었다는 이 책을 처음엔 반신반의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미있어 단숨에 읽었다. 가끔 이런 책들이 사진 중심으로, 내용이 부족한 책들도 있어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튜버 활동을 하면서 내용이 쌓여 그 인기로 펴낸 책들도 괜찮은 읽을거리가 됨을 보여주어 좋았다. 영상보다는 활자나 그림을 더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출판이리라.
영화의 장면들로 어쩐지 익숙한 도시처럼 느껴지는 뉴욕을, 그곳에 사는 저자가 사소하지만, 중요한 정보를 재미있게 소개하고,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쓰고 사진을 찍어 매력적으로 소개한다. 그곳이 궁금한 이들, 기억 속에 있는 뉴욕을 느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이 책의 정보가 적절하다. 감각적으로 찍은 화보가 멋지고, 소개한 곳들이 재미있다. 저자가 자신의 젊은 날의 뉴욕 경험을, 영상에 담고 그 영상을 활자로도 표현한 이 책을 읽으니 내 기억 속의 뉴욕이 더 풍성해지고, 다시금 그 도시를 갈 꿈을 꾸게 한다.
사유의 깊이가 읽히는 글을 접하면 내가 사유한다. 기록으로 존재하는 전쟁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글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 시대를 공감하고 이해하게 한다. 나는 책을 읽는 일에 재미를 느낌이 감사하다. 공기보다 가볍게 흩어질 인생이지만 이런 글들이 남아서 생을 살아갈 많은 이들에게 재미를 준다면 그것으로 활자는 그 역할을 했으리라.
강애라
숭곡중학교 국어교사. 전국학교도서관모임 전 대표. 서울학교도서관모임 회원.
책을 통해 성장한 저는 책과 함께한 시간들이 소중해서, 평등하고 온기가 넘치는 학교도서관을 꿈꾸었습니다. 성찰이 있어 평안한 60+의 인생을 향해 오늘도 책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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