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듯 움츠리고 있던 앙상한 나뭇가지에 연둣잎 새순이 고물고물 움을 틔울 때, “봄이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곤 합니다. 봄은 나뭇가지 끝에서 온다지요? 4월이 되니 울적했던 마음에 연초록 봄물이 차오릅니다. 늘 우리 곁을 묵묵히 지켜주고, 토닥여주고, 넓게 품어주는 나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나무 관련 그림책 4권 소개합니다.
『다 같은 나무인 줄 알았어』
김선남 글.그림|그림책공작소|2021년|48쪽
나무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하는 김선남이 쓰고 그린 그림책입니다. 창작실에서 집까지 버스로 열 정거장이 되는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여러 나무를 만나게 된다고 해요. 작가는 그 나무들을 오래 바라보며 얘기 나누길 좋아한답니다. 얼핏 보면 다 같은 나무인 듯해도 찬찬히 들여다보고 얘기 나누다 보면 나무마다 각기 다른 몸짓과 표정으로 반짝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대요. 그 아름답고 개성진 얼굴들을 작가는 실크스크린의 고운 선과 색에 담아 우리 앞에 나붓나붓 펼쳐놓습니다.
두 면 가득 파스텔 톤의 초록 나무들이 가득한 겉표지는 유난히 순순하고 다정합니다. 이에 끌려 가만가만 쓸어보면 놀랍게도 여린 나무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여느 그림책 표지와 달리 “질감이 느껴지는 마분지에 인쇄하고 비닐코팅을 하지 않았다.”더니 그 때문인 걸까요?. 책장을 넘기기도 전에 책에 빠져들고 맙니다.
“우리 동네엔 나무가 참 많아./ 처음엔 다 같은 나무인 줄 알았어.
꽃이 펴서 알았지./ 벚나무였다는 걸.”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는 같은 구조로, 은행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계수나무, 감나무, 크리스마스 나무(구상나무)의 아름다움과 개성을 차례차례 보여줍니다. 그 눈길과 손길이 어찌나 곱고 정성스러운지 저도 모르게 요리조리 들여다보고 쓰다듬고 가까이 코를 대어 보기도 합니다. 나무에게도 이런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겠지요? 나무의 아름다움과 함께 정성 어린 관심과 사랑만이 그 존재를 그 존재로 빛날 수 있게 한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마지막 나무』
에밀리 하워스부스 글.그림|장미란 옮김|책읽는곰|2021년|40쪽
데뷔작 《어둠을 금지한 임금님》으로 평단과 독자의 극찬을 받았던 에밀리 하워스부스가 국내에 선보이는 두 번째 그림책입니다. 색연필로 쓱쓱 그려 나간 그림들이 내용만큼이나 단순한 듯하면서도 통렬합니다.
옛날에 한 무리의 친구들이 살 곳을 찾아 헤매다 숲을 발견하고선 그곳에 깃들어 살았답니다. 친구들은 여름내 나무 사이에서 뛰놀고 푹신한 이끼 위에서 잠이 들었지요. 그러나 겨울이 되어 찬바람이 불어오자 나뭇가지를 잘라 모닥불을 피우고, 잘린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들이치자 나무를 베어 집을 지었더랍니다. 집을 지어놓고 보니 필요한 게 너무도 많아 나무를 베고 또 베어 가구와 물건들을 만들었지요. 뻥 뚫린 사이사이 바람이 휘몰아치자 그들은 얼마 안 남은 나무들을 죄다 베어내 거대한 벽을 만들고 맙니다. 이제 그들은 벽만 바라보며 집안에 갇혀 살게 되었지요. 점차 소통이 사라지고 서로를 오해하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마지막 어린 나무 하나가 남아 있었던 걸 기억해낸 어른들은 그 나무를 차지하기 위해 아이를 시켜 몰래 베어오라 합니다. 이집 저집의 아이들은 벽을 넘어 ‘마지막 나무’ 앞에서 만납니다. 그렇게 만난 아이들은…….
뒤가 궁금한 분들은 책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신랄한 풍자 속에서도 위트가 넘치는 이 책은 자연 파괴를 서슴지 않는 인류의 끝이 절망적임을 경고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 끈을 우리도 함께 쥐고 싶도록 이끕니다.
『커다란 나무』
레미 쿠르종 글.그림|나선희 옮김|시공주니어|2006년|26쪽
‘자연과 인간의 연계성’을 성찰케 하는 이 책은 하양, 검정, 보라, 초록, 주황만으로 1쪽부터 끝 쪽까지 독자의 시선을 그림에 꽉 잡아둔 채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번 등장하는 이 다섯 색상의 매력적인 변주는 다음 장을 궁금케 하고, 작은 컷 한두 개가 담긴 왼쪽 면은 동동동, 26×36cm 전면 그림인 오른쪽 면은 두둥두둥두둥~, 서로 어울려 멋진 연주를 합니다. 자칫 그림에 매혹당해 글을 놓칠 수 있으니 글도 찬찬히 읽기를 권해요. 글 또한 재치 있고 웅숭깊습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굉장한 갑부 아저씨가 개인 비행기로 하늘을 날다 맘에 쏙 드는 커다란 나무를 발견하고선 그 나무를 사서 자기 집으로 옮기고자 해요. 그러나 그 나무는 옆집 할머니의 작은 나무와 뿌리가 엉켜 있어 그 나무까지 사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답니다. 돈으로 뭐든 할 수 있었던 아저씨는 작은 나무까지 사들이려 했지요. 여차하면 할머니까지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겠다면서요. 그러나 할머니는 아저씨에게 갓 구운 아몬드 쿠키와 향기로운 차를 권하며 제안을 거절합니다. 80평생 그곳에서 쿠키를 굽고 차를 마시며 나무들과 정겹게 살아왔으니까요. 그 여유와 다정함이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요? 아저씨는 커다란 나무를 들어내느라 30명이나 되는 정원사를 동원해 몇 날 며칠 파헤쳐 놓았던 흙을 1년 동안 혼자서 다 다시 덮은 후, 할머니에게 핸드폰을 선물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며칠 후 할머니는 아저씨에게 전화해, “그 부자 아저씨야, 널 바꿔 달래!”라고 나무에게 소리치며 얘기는 끝납니다.
자칫 진부할 수도 있는 주제의 이야기를 레미 쿠르종은 그만의 매력적인 색채와 구성, 재치 있는 시적 문장을 통해 넘기는 장마다 파란 바람이 일도록 변신시켜 버렸습니다. 꼭 읽어 보길 권합니다.
『메이의 정원』
안나 워커 글.그림|김경연 옮김|재능교육|2018년|40쪽
작고 소소한 것에서 큰 기쁨을 창조해 내는 안나 워커의 따스한 그림책입니다.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선선한 수채 물감의 담백하고 편안한 그림이 보는 이의 마음마저 평화롭게 합니다.
가족을 따라 도시로 이사를 온 메이는 옛집의 정원이 몹시도 그립습니다. 빽빽한 건물들로 둘러싸인 새집에는 정원을 만들 공간이 전혀 없었어요. 메이는 물결 이는 풀밭에서 나비를 쫓아가고 싶었지요. 그래서 건물과 건물 사이 바닥 공간에 나비를 그리고, 풀과 꽃, 애벌레도 그렸답니다. 친구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행복했지요. 그러나 비가 오자 정원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어요. 이번엔 이삿짐을 담아온 상자들 바깥면에 나무와 새, 꽃과 곤충 들을 빼곡히 그려 멋진 정원을 만들었답니다. 하지만 아빠가 짐을 정리하려 상자들을 들고 나가 버리는 바람에 정원이 무너지고 말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메이는 사과나무 새를 좇아가다 아름다운 숲 화원 바닥 틈새로 고개를 내민 초록빛 싹 하나를 발견합니다. 메이는 숲의 한 조각인 그 싹을 소중히 품고 집에 돌아와 작은 병에 심고 물을 주지요. 좀 지나 싹은 초록 잎들을 틔워내고, 자신감이 생긴 메이는 건물과 건물 사이 바닥 공간에 크고 작은 화분들을 들여놓고 친구들과 함께 정원을 가꿉니다. 아이들의 얼굴엔 방긋한 미소가 피어나고, 이제 그 미소만큼이나 아름다운 초록 잎들이 집집마다 물결치며 건물 전체를 푸르게 물들입니다.
메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막히면 돌아가고 돌부리에 걸리면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걷는 그 모습이 오래도록 가슴에서 메아리칩니다. 순수한 열정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힘이 있나 봅니다. 자연을 울안으로 들이는 일이 생각만큼 어렵지 않겠다는 깨달음과 함께 메이의 순수함에 빠져들게 되는, 드물게 아름다운 책입니다.
어른 그림책 연구모임
어른그림책연구모임 – 백화현
그림책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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