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싱숭생숭하거나 몸이 아플 때면 훌훌 털고 일어나 아무 데나 무작정 걷고 싶습니다. 그 길이 숲길이나 천변이라면 더 좋겠지요? 걷는다는 것, 아무런 목적 없이 천천히 걷다 보면 주변에 이름 없는 수많은 들꽃과 풀들이 말을 걸어옵니다. 향기로, 색으로, 모습으로, 때로는 은밀한 속삼임으로.
처음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싶더니, 이름을 알고 나서는 화분이나 정원에 길러보고 싶어지고 이제는 그들의 모습을 그리고, 수놓아 내 일상을 꾸미고 싶어집니다.
어렸을 때는 뭐든지 오리고 만들고 그리는 일을 어렵지 않게 했던 것 같아요. 창작의 시간이 일상 속에 언제나 함께 했었지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창작은 전문가의 몫으로 넘기고 곁눈질하고 감상하다 부러워하고만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요, 이 책 3권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다시 어린이처럼 창작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져요.
『연남천 풀다발』
전소영 ∣ 달그림 ∣ 2018년 ∣ 53쪽
작가인 전소영은 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하고 남편과 함께 연남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주변의 사소한 것, 생명이 있는 것, 아름다운 것들의 소중함을 글과 그림으로 담아 그림책을 씁니다. 그가 그린 다른 책으로 <적당한 거리>란 책도 참 좋아요.
‘모든 것은 가을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가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이어지지요. 계절의 흐름에 따라 작가가 걸었던 천변의 들꽃들과 풀들의 모습을 여백의 아름다움을 살려 동양화처럼 펼쳐냅니다. 그래서 이 책은 한 장 한 장 표구를 해서 집안 곳곳에 걸어두고 싶어져요.
글은 또 어떤가요? 거의 모든 문장들에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어 몇 번을 곱씹어 생각하게 합니다. 떨어진 단풍잎 사이로 쭈뼛 피어난 애기똥풀을 보고 ‘모두가 질 때 피는 꽃이 있다는 것이, 모두에게 저마다의 계절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마다 생긴 모양이 다른 열매를 보고서는, ‘세상엔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라고 이야기하고요, 잎사귀 모양이 다른 바랭이와 마디풀을 보고서는, ‘둥근 풀은 뾰족한 풀이 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라고 말하지요. 한여름에 무성해지는 풀들을 보고서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자라기에 모두에게 좋은 때’라고 하고, 시원한 환삼 덩굴을 책장 가득 펼쳐 놓아요.
땅을 보며 들풀만 보고 걷다가 무성해진 단풍잎의 그림자를 느끼고는 ‘때로는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라고 하고요, 계절이 다시 돌아오는 길목에서 ‘언제나 똑같은 계절은 없다. 반복되는 일에도 매번 최선을 다한다.’라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담습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듯 보이지만 똑같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대강 어제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들꽃이 핍니다』
김근희 저 ∣ 한솔수북 ∣ 2012년 ∣ 34쪽
김근희 작가는 이름 모르게 피고 지는 들꽃이 어떻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지 전하고 싶어 이 책을 펴내게 되었다고 해요. 작가는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시장을 돌아다니며 맞춤한 헝겊을 고르고, 정성스럽게 수를 놓아 그림을 빚고 이야기를 지었지요.
그 안에서 제비꽃, 꽃마리, 뱀딸기, 까마중, 나팔꽃, 자운영이 꽃망울을 맺고 꽃잎을 한껏 피워 올리고 나서 꽃잎이 지고 열매를 맺습니다. 작가는 그 과정을 수로 놓기 위해 허리를 잔뜩 숙여 얼마나 오래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을까요? 장면마다 다른 질감이 만져질 듯한 색색의 천 위에 한땀 한땀 수를 놓아 들꽃들의 일생을 펼쳐 놓았어요.
중, 고등학교 다닐 때 프랑스 자수를 배운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얀 면 티셔츠에 또 천으로 된 가방이나 컵 받침 같은 일상 속 소품들에다가 수를 놓아봐도 좋겠어요.
하얀 눈이 내리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봄비가 씨앗을 깨워 햇볕 한 모금, 바람 한 모금 마시고 새싹들이 자라는 모습도 앙증맞아요. 들꽃의 씨앗들은 겨울이 되어 개미와 다람쥐와 고슴도치들 도움으로 다시 땅속에서 싹을 틔울 준비를 하지요.
화려하진 않지만 저마다의 색과 모습으로 피어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자수로 소박하게 담아낸 이 책은 작지만, 우주를 품은 씨앗이 꽃이 되고 열매가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정성으로 빚은 책입니다.
『나뭇잎으로 찍어 그리는 식물 페인팅』
김지아 저 ∣ I THINK 아이생각 ∣ 2022년 ∣ 240쪽
김지아 작가는 의상을 전공해서 화려한 것들을 동경하다가 식물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이 마음이 끌려 최소한의 것으로 여백 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식물 페인팅을 하게 되었다고 해요.
이 책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 나뭇잎, 풀, 채소 등을 그림의 대상이 아니라 직접 재료로 사용해 직물 염료로 찍어 내서 독특한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만든 작품들의 장점은 똑같은 무늬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라네요.
식물들이 가진 고유한 무늬를 천이나 종이 위에 아름답게 구성하여 작품을 만들면서 어렸을 적 당근이나 호박을 모양을 내서 자른 후 종이에 찍기 놀이를 하며 즐거워했던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의 처음에서는 쉽게 식물 페인팅을 접할 수 있도록 완성된 에코백, 무지 파우치, 단색 셔츠, 손수건 등에 섬유 물감으로 식물을 찍어내는 방법을 소개하고, 그 다음엔 식물로 찍어 인테리어 소품 만드는 방법, 마지막에는 식물 페인팅으로 패턴 패브릭을 만들어 작품을 만드는 방법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산책을 하다가 내 주변에서 주운 감잎 하나, 강아지풀 한 가닥, 수국 잎만으로 멋진 일상의 소품을 만들어 보아요. 작가처럼 예쁘고 완벽하게 찍어내지 못해도 나만의 독특한 작품이 되겠지요.
송경영
꽃과 나무, 책과 도서관,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경험을 소중히 여기며 끊임 없이 배우고 무언가를 도모하는 국어 선생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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