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찾아왔어요

 

시를 좋아하시나요? 마음을 일렁이게 하고 영혼 어딘가를 두드리는 듯한 그런 거요.
이런 시에 환상적인 그림까지 곁들여 있다면 어떨까요? 만나봄 직하지 않을까요?
저만치서 봄이 다가오는 2월, 굳은 마음의 빗장을 풀어줄 ‘시 그림책’ 3권 소개합니다.



『꽃밭에서』

어효선 동시|하수정 그림|섬아이|2015|40쪽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봉숭아도 채송화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애들하고 재미있게 뛰어놀다가, 아빠 생각나서 꽃을 땁니다, 아빠는 꽃처럼 살자고 했죠, 날 보고 꽃같이 살라고 했죠.’
친숙한 내용이죠? 그렇습니다. 코 훌쩍거리던 어린 시절 선생님의 풍금 소리 따라 어여쁘게 불렀던 동요 ‘꽃밭에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래로 만들어지기 한 해 전인 1952년, 《소년 세계》에 동시로 먼저 발표가 되었더랬지요. 당시 어효선 시인은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집 마당 한쪽 꽃밭에 피어 있는 꽃들을 보며 이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전쟁 중 꽃이라니!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에게 특별한 영감을 불러일으켰을 법합니다. 시에서 직접 전쟁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며 읽다 보면, 어째서 아빠가 ‘꽃처럼 살자고, 꽃같이 살라고’ 거듭 강조하는지 그 마음이 읽혀져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이 책은 이 시에 하수정이 파스텔과 수채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넣어 만든 그림책입니다. 첫 장을 열면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물조리개를 들고 빈 마당 한쪽에 불그레 피어 있는 꽃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이는 반갑게 달려가 꽃밭에 물도 주고 나비를 쫓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죠. 그러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을 따라 조롱조롱 피어 있는 나팔꽃을 보며 그리움에 잠깁니다. 그러나 곧 그 마음을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친구들에게 달려가 고무줄을 하며 뛰어놀지요. 그래도 그리움이 가셔지지 않았나 봅니다. 아이는 꽃을 따 그 향기를 맡으며 아빠와의 추억 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은은하면서도 화사한 수채물감과 몽글몽글한 파스텔의 그림들이 추억을 소환하고 그리움을 짙게 합니다. 양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여리여리한 꽃잎 속으로 빠져드는 아이의 애틋한 표정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아리게 하지요. 현재와 회상, 꽃과 전쟁의 대비를 화사한 붉은 색조와 애잔하면서도 역동적인 갈색조로 배치한 작가의 감각이 돋보입니다. 어린 날 노래로 불렀던 시를 아련한 그림책으로 다시 만나니 그 시절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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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윤동주 시|이성표 그림|보림|2016|40쪽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지고 영혼이 맑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윤동주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시들은 그런 그를 닮아 맑고 순수합니다. 시 ‘소년’은 특히나 그렇지요. 읽다 보면 내 마음에도 맑은 강물이 흐르고 온몸이 푸르러지는 듯합니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소년’ 시 전문입니다. 1939년 쓰였던 당시에는 제목이 ‘少年’으로 되어 있고 세로쓰기인데다 ‘얼굴’을 ‘얼골’이라고 쓰는 등 오늘날과 다른 부분이 있어 이를 현행 어법에 맞게 다듬은 것 말고는 처음 내용 그대로이지요. 산문시라서 얼핏 운율이 없는 듯 보이지만 읽다 보면 노래로 부르고 싶을 만큼 리듬감이 살아 있습니다. 또한 이미지가 강하고 매우 감각적이어서 뚝뚝 떨어지는 나뭇잎이 내 몸에 달라붙을 듯하고, 내 눈썹과 내 손바닥에서도 파란 물감이 묻어날 것만 같지요. 소년은 떠나가는 가을과 만날 수 없는 사랑을 슬퍼하면서도 곧 찾아올 봄을 믿습니다. 그의 마음엔 끝없이 맑은 강물이 흐릅니다.
이성표는 이리도 아름다운 시에 그림을 입혀 더욱 황홀한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첫 장부터 끝장까지 파랑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 전개되는 그의 그림은 시의 표면뿐 아니라 그 심연에까지 닿아있는 듯합니다. 그는, “너무 꾸미거나 되바라지지 않은 그림, 과장되지 않고 진솔해서 마음에 와닿는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까, 하는 희망을 늘 갖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시의 그림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의 색과 선으로 시를 살려내고 그림에 스며들게 합니다. 우리를 푸르게, 푸르게 물들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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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별』

파블로 네루다 시|엘레나 오드리오솔라 그림|남진희 옮김|살림어린이|2010|24쪽

사람들은 마음에 별 하나씩은 품고 산다지요? 이룰 수 없는 꿈, 이뤄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면서도 차마 포기할 수 없고 떠나보낼 수 없어 그 별을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곤 합니다. 젊은 날엔 더더욱 그렇지요. 그러나 그 별을 억지로 고집하고 소유하려 한다면 어찌 될까요? 칠레의 시인이자 세계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파블로 네루다는 ‘안녕, 나의 별’을 통해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합니다.
밤하늘의 별을 사랑하는 이가 있었지요. 그는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간절한 염원을 담아 그 영롱한 별 하나를 떼어 내 주머니에 넣어 돌아옵니다. 그러나 별은 수줍게 떨며 얼음보다 더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지요. 겁이 난 그는 별을 침대 밑에 숨겨 놓지만 내뿜어져 나오는 별빛은 집 천장과 지붕을 뚫고 한없이 퍼져 나갑니다. 그러자 익숙했던 집 안의 사물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하고 그의 생활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맙니다. 셈하는 법도 잊고 밥 먹는 것도 잊을 만큼요. 창문으로 새어 나온 밝은 빛에 이끌려 사람들이 모여들고, 수군대기 시작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별을 몰래 숨겨 저 멀리 서쪽 초록빛 강으로 가 별을 놓아줍니다. 별은 마치 물고기처럼 날렵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멀어져 가고, 그는 작별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돌아서고 맙니다.
깊이 묻어둔 젊은 날의 이상과 열정이 되살아난 듯 가슴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차분한 색조와 절제된 직선의 그림들이 아니었더라면 한없이 풀려버릴 듯싶습니다. 넘치도록 높은 이상이나 서로를 옥죄는 사랑은 떠나보내는 게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존재를 영롱케 하는 ‘별’인 것을요. 떠나보낼지라도 작별 인사는 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아이러니. 네루다는 이를 깊이 통찰하고, 엘레나 오드리오솔라는 그런 번민을 다 이해한다는 듯 담담히, 그림으로 위로를 건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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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그림책 연구모임

어른그림책연구모임 – 백화현
그림책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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