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명절이면 여행객들로 공항이 북적이는 것이 전혀 낯선 일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명절에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기차표를 구하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하고 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명절의 풍경은 분명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 명절 중에도 새해 첫날이라는 의미로 더욱 소중하게 대접받던 명절이 설날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온 가족이 모여 오랜만에 시끌벅적 사촌들을 만나고 차례를 지내며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을 받는 즐거움에 한껏 기다리던 명절 중 최고의 명절이었지요.
어른이 되고 보니 그런 명절들이 어린 시절처럼 마냥 즐겁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몸으로 느꼈던 설렘과 향수는 가끔은 아무런 부담 없던 어린 시절을 소환하곤 합니다.
그렇게 불려 나온 어린 시절의 설 명절을 네 권의 그림책과 함께 기억해 보려고 합니다.
『여우난골족』
백석 (시), 홍성찬 (그림) | 창비 | 2007 | 52쪽
여우가 나온 골짜기에 사는 일가친척 수십 명이 설날을 맞아 큰집에 왁자하게 모이면 모처럼 만난 아이들은 반가움에 서로 얼싸안고 즐거워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방안에 그득히 모이면 새 옷 냄새, 인절미, 송기떡, 콩고물 찰떡 냄새가 가득합니다.
백석 시인이 표현한 100여년 전 우리의 명절 풍경이 투박한 듯하면서도 섬세한, 그리고 구수한 느낌의 진한 그림으로 살아나 설렘과 포근함이라는 설 명절 풍경으로 유년의 정서를 불러냅니다. 등장인물인 신리 고모네, 토산 고모네, 큰골 고모네, 그리고 작은아버지네는 저마다의 삶의 사연들을 풀어가며 너울너울 장단에 맞추듯이 소개됩니다.
백석의 여우난골족의 명절이 홍성찬 작가에 의해 설 명절로 표현된 것은 가족이라는 혈연 공동체가 한데 어우러져 정겨움과 관심과 흥겨움을 표현하기에는 우리 민족 최대 명절인 설날이 최고였을 것입니다.
표지에서 펄펄 내리는 흰 눈과 함께 시골집에 모인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 나오는 그림을 시작으로, 큰집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 문 앞의 눈사람, 흰 눈이 소복이 덮인 벌판과 나뭇가지들, 눈길의 소달구지, 섶다리 아래 얼어붙은 강 위의 썰매 타는 아이들 등 볼거리 풍성한 그림은 어느 하나도 놓칠 수가 없습니다.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서로 얼싸안고 즐거워하는 모습, 음식 준비에 분주한 풍경, 호롱불 아래 둘러앉아 식사하는 모습 등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괜시리 훈훈해집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며 배나무 동산에서 밤이 어둡도록 떠들썩하게 놀고 방으로 돌아와서도 밤새도록 놀다가 서로 아랫목을 차지하겠다고 하며 새벽녘에야 잠이 들지요. 어른들은 어른들 대로 두런두런 소리가 들립니다.
다음날 무이징게국이 끓는 설날 아침 펄펄 내리는 함박눈은 그 정서를 더할 나위 없이 보태며 옛날에 시골에서 명절을 보내던 기억들을 새록새록 불러옵니다.
『설날 덕담 한 그릇 떡국의 마음』
천미진 글, 강은옥 그림 | 키즈엠 | 2019 | 32쪽
긴 가래떡을 뽑고 둥글게 떡을 썰며, 보글보글 육수를 내고 달걀 지단을 준비하고 푹 익은 소고기를 잘게 찢고 파와 김가루까지 어우러져 준비된 설날 아침 떡국 한 그릇의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음력 1월 1일 설날 아침에 온 가족이 모여 먹는 새해 첫 식사가 떡국입니다. 순수와 장수를 뜻하는 긴 가래떡을 둥글게 썰어 정성껏 끓인 떡국을 먹어야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고 하지요. 표지에 정갈하게 끓여진 떡국을 두 손으로 들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면 정성스럽게 끓여진 떡국의 마음이 궁금해집니다. 설날 떡국이 정성스레 준비되는 과정을 얼른 따라가 보겠습니다.
무탈하기를 기원하는 가래떡, 그걸 둥글게 썰며 새해가 빛나기를 바라고, 시간을 들인 육수와 달걀 지단은 따뜻한 세상과 조화로움을 소망합니다. 이렇게 떡국이 끓여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니 떡국을 끓이던 어머니의 그리움과 마주합니다. 설날 아침 떡국을 맛있게 먹고 새해 복 듬뿍 받으라는 가족 모두의 복을 비는 정성과 기도가 담긴 덕담의 떡국 한 그릇은 결국 어머니의 마음이었군요.
사실 요즘은 판매하는 떡국용 떡과 사골 국물로 뚝딱 끓여 달걀 풀고 김가루를 뿌려주기만 하면 맛있는 떡국 한 그릇이 금방 차려지지요. 그러다 보니 어렸을 적 먹던 설날 떡국을 잊고 있었습니다, 잊은 건 떡국 만이 아니었습니다. 분주했던 설날 어머니의 부엌도, 정성 어린 마음도 모두 저만치 잊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책 덕분에 설날 무심코 먹었던 떡국 한 그릇을 더 의미 있게 감사히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설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떡국의 마음>을 나누겠습니다.
『설빔, 여자아이 고운 옷
설빔, 남자아이 멋진 옷』
배현주 (글/그림) | 사계절 | 2006 | 30쪽
배현주 (글/그림) | 사계절 | 2007 | 44쪽
“뭐니 뭐니 해도 ‘새’중에서 가장 좋은 건 바로······ 새 치마저고리! 엄마가 지어 주신 설빔이에요,”
설빔은 설을 맞이하여 새로 장만해서 차려입는 옷과 신발을 이르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설날이 되면 어린이들을 위해 새로 설빔을 준비하곤 합니다. 전통적으로 각 가정에서는 가을부터 옷감을 마련하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없이 살림 정도에 따라 설빔을 만들었다고 하니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 미리 옷감을 준비하고 만드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설빔>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설빔을 입는 과정을 그린 예쁜 두 권의 그림책입니다.
여자아이의 고운 옷은 치마를 입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겉자락은 오른손, 안자락은 왼손으로 잡고 다홍치마를 몸에 두르고 치마끈의 매듭을 짓습니다. 수눅을 맞춰 솜버선을 신고 오른섶을 안으로 왼섶은 밖으로 색동저고리를 입습니다. 댕기까지 하고 좌경 앞에 앉은 모습은 고운 선녀님 같습니다. 아빠가 사주신 꽃신과 털배자를 입고 조바위까지 머리에 쓰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 옷입니다.
누나보다 얼른 더 크고픈 남자아이는 혼자서 설빔을 입어봅니다. 버선코가 앞으로 오게 버선을 신고, 허리띠를 묶지 않으면 훌렁 벗겨지는 바지를 허리폭을 잡고 바짓부리를 잡고 대님을 매듭지어 입습니다. 혼자서도 바지를 잘 입은 남자아이가 스스로 기특하다며 칭찬을 합니다. 비단 저고리 위에 배자도 입고 까치두루마기를 걸치고 전복을 입고 전대를 매듭짓고는 할아버지 흉내를 내봅니다. 아버지가 사주신 태사혜, 이 신을 신고 제기를 차면 친구들을 다 이길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호건까지 쓰고 복 받으러 나갈 차비를 끝냈습니다.
새해, 새날, 새 아침, 새 옷…… 온통 새 것으로 시작하는 새해 첫날 아침, 우리는 떡국을 먹고 만두를 먹고 한 살을 더 먹으며, 일가 친척을 만나 세배도 하고 덕담도 들으면서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합니다.
어른 그림책 연구모임
어른그림책연구모임 – 손효순, 유주현
그림책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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