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상처를 주고 가슴을 흔들어 놓는 존재가 남이라면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안 마주치면 되니까요. 하지만 물보다 진한 핏줄로 이어져 있어서 안 보고 있어도 이미 내 혈관과 기억을 타고 흐르는 가족의 경우라면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따뜻한 둥지가 되고 힘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가정이 훈훈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도 결국 우리 모두의 시선은 가족에 고정되어 있고, 삶의 우선순위를 차지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되어 주기에 오늘도 내 가족, 내 가정을 먼저 돌아봅니다.
『우리 가족입니다』
이혜란 글,그림 | 보림 | 2005년 | 30쪽
작은 식당을 운영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는 우리 집에 어느 날 문득,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가 택시를 잡아타고 오십니다. 할머니는 헌 옷가지를 주워오는가 하면, 음식을 흘리며 먹고 대소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합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우리 가족’ 속으로 들어오면서 온 가족이 매일 매일 전쟁을 치르다시피 합니다. 할머니를 다시 가시라고 하면 안 되느냐고 묻는 나에게 아빠는 대답합니다.
“그래도 안 돼. ……엄마니까. 할머니는 아빠 엄마거든.”
‘나’는 비록 어리지만 그런 아빠의 결심을 함께 받아들이면서 할머니를 ‘우리 가족’으로 인정하며 살아갑니다. 있는 힘껏 아빠를 업어드리면서 아이가 툭 던지는 말이 큰 울림을 줍니다.
“아빠, 나 또 일 센티 컸다!”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부모의 따뜻함과 온기를 입고 하루하루 성장합니다. 내가 어릴 때 마른자리 진자리 갈아 뉘시며 밤잠 설쳐가면서 부모님께서 나를 키워 주셨던 것처럼, 인생의 고비를 지나 다시 어린아이가 된 부모님을, 이젠 우리가 돌봐드려야 할 시간입니다.
『여름의 잠수』
사라 스트베리 글, 사라 룬드베리 그림, 이유진 옮김 | 위고 | 2020년 | 42쪽
한 지붕 아래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으면서 함께 살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우울에 갇히면 우린 각자 섬이고 혼자가 됩니다.
날개를 잃고 우울증에 걸린 아빠가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어린 소이는 병문안을 갔다가 ‘사비나’를 만납니다. 그해 여름 소이는 사비나와 함께 ‘다른 세상’으로 깊이 잠겨 들어가면서 아빠의 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둘은 햇빛 속에 누워 하늘에 가느다란 줄을 그리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았고, 가끔 잔디밭에서 잠이 듭니다. 그러면서 소이는 사비나처럼 아픈 아빠의 깊은 슬픔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됩니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건,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그가 있는 곳까지 함께 내려가 보는 것 아닐까요? 어린아이도 어른의 슬픔에 다가가서 공감할 수 있고, 그런 ‘아이’로 인해 어른들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따뜻한 그림책입니다. 사라 스트리츠 베리는 스톡홀름의 베콤베리아 정신병원에 친척을 면회 갔던 유년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이 그림책을 썼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끈』
패트리스 카르스트 글, 조앤 루 브리토프 그림, 김세실 옮김 | 북뱅크 | 2021년 | 40쪽
사랑으로 만들어진 아주 특별한 끈을 느껴보신 적 있나요? 여기 ‘보이지 않는 마음의 끈’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멀어지면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 찹니다. 눈에 보이는 거리가 마음의 거리와 비례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마음의 거리와 몸의 거리는 꼭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보이지 않는 끈 때문입니다.
이 책의 그림과 글이 유달리 인상적이거나 독보적인 감탄을 자아내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면에 빠짐없이 펼쳐지는 하트 그림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랑’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보이는 글은 읽어갈수록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안심, 세상과 이어져 있다는 믿음이 가슴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마지막 장면을 펼치면 ‘하아!’ 하는 낮은 숨을 내뱉게 됩니다. 하트 모양의 오로라 아래 남녀노소가 함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은 뭉클한 감동을 줍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은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여전한 천둥번개에도 미소를 지으며 잠든 쌍둥이 남매들처럼요.
『선물』
김은미 글,그림 | 백화만발 | 2020년 | 68쪽
“사랑합니다.”
부모님과 자녀에게 가장 최근에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언제일까요? ‘사랑’은 좀 흔해져도 되는 말 아닐까요? 시니어 그림책 『선물』은 엄마의 70세 생일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그림책입니다. 글은 엄마의 출생부터 엄마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딸의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그림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생일상에 둘러 앉을 때까지를 보여 줍니다. 글은 엄마의 이야기를, 그림은 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느 드라마에서 “가족은 선물처럼 온다”는 대사가 생각납니다. 엄마의엄마와 엄마와 딸, 그리고 그 딸의 딸이 서로에게 선물입니다.
엄마의 이름은 윤옥이입니다. 입학식 때 선생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윤옥, 수업시간이 길고 지루해 엉덩이를 들썩이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부모님을 조르는 그녀의 모습에는 우리들의 엄마와 우리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엄마로서의 엄마만 기억합니다. 엄마에게도 유년기와 청소년기, 가슴 뛰는 사랑을 하던 청년기가 있었을까 싶지만 그녀들도 우리와 같은 시간을 살아서 ‘나의 엄마’가 되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어른 그림책 연구회
어른그림책연구회 – 김명희, 유수진
그림책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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