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개봉한 영화 <인사이드 아웃2>에 나오는 다양한 감정 중에 많은 관심을 받았던 캐릭터가 ‘불안이’였습니다. 극 중 빌런 역할로 다른 감정을 지배하려고 하니, 다스리기도 어렵습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것들에 대비해 미래를 계획해”라는 “불안이”의 대사는 이런 자신의 역할을 잘 나타냅니다. 더 잘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었지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불안도 여러 가지 감정들과 함께 다양하게 표출됩니다. 어렸을 때는 성숙한 어른이 되면 이런 불안의 감정은 사라질 줄 알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보니 더 다양한 종류의 깊은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더군요.
천의 얼굴을 한 다양한 ‘불안이’를 만나 볼 그림책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두려움에 ‘불안이’를 외면하려고 애썼다면 오늘은 그대로 들여다 보자구요. 그 불안도 바로 나일테니까요.
1. 불안으로 인한 불안
≪불안≫
조미자 (지은이) │ 핑거 │ 2019년 │48쪽
불안이라는 녀석은 때때로 어지럽게도, 무섭게도 찾아옵니다. 어떤 때는 가득 차 있기도,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기도 하지만, 언제 다시 불쑥 나타나 놀래킬 지도 모릅니다. 그 녀석에 대해 궁금하기는 하지만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용기를 내어 만나 보겠습니다.
그 녀석이 들어간 구멍에 걸쳐있는 끈을 잡아당기자 잔뜩 화난 큰 오리가 딸려 나와 계속 집요하게 따라옵니다. 애써 숨어 보지만 스토커처럼 찾아내고 맙니다. 마침내 오리를 피해 작은 방으로 도망갑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온통 문밖의 화난 오리 생각뿐입니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등의 강렬한 원색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정을 표현한 거친 선, 수평화면 분할 속의 그패픽 노블식 배치는 얼핏 추상화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그림책 속 아이의 공간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색감의 변화로 여러 감정의 모습을 시각화해서 전달합니다. 그림책을 여러 번 보니 불편하던 불안이 밝고 강한 색감과 어우러져 아이와 오리의 표정에 담긴 익살스러움을 따라 재미있고 유쾌하게도 보입니다.
아이는 벽을 사이에 두고 오리에 대해 생각하며 잠이 듭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문밖의 오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작아져 있습니다. 이제 작아진 오리를 만나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여전히 졸졸 따라다니지만 무섭지 않습니다. 편해진 감정으로 오리와 일상을 함께 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 일상의 불안도 한잠 자고 나면 작은 오리가 되어있으면 좋겠습니다.
2. 두려움으로 인한 불안
≪어쩌면 문 너머에≫
송기두 (지은이)│글로연│2023년│54쪽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행여 바람이라도 들어올까 봐 문을 꼭 닫고 겨울옷과 머플러로 온몸을 감싼 채 집 안에만 있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문 안에만 있으면서도 문밖의 바람 틈에 있는 무엇인가가 자신을 훔쳐볼까 두려워합니다. 혹시라도 문이 열리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바람 소리에 섞여 ‘똑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처음에는 절대 문을 열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혹시 시원한 바다 냄새를 싣고 나를 먼 곳으로 데려다줄 여행이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용기를 내어 힘겹게 문고리를 잡아당깁니다. 과연 문밖에는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열고 닫히며 물리적인 공간 구분에 쓰이는 문을 통해 주인공의 마음 여닫음을 표현한 작가는 전공이 건축이라고 합니다. 노출 양장제본의 그림책은 문 모양의 직사각형으로 판형이 다른 책보다 큽니다. 덕분에 흑백의 연필로 세밀하게 그려낸 원화의 선을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연필화를 보며 방심하는 순간! 섬뜩하게 나타나는 붉은 눈의 늑대와 툭 튀어나오는 보라색의 날카로운 손톱, 살짝 들려 올라간 문 아래로 휩쓸려 들어오는 파란색의 홍수가 긴장감을 줍니다. 이제 문이 열린 장면으로 옮겨가며 다시 ‘똑 똑 똑’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붑니다.
여전히 두려움에 불안하지만 용기내어 다시 문고리를 잡는군요.
3. 내면 아이로 인한 불안
≪어른들 안에는 아이가 산대≫
헨리 블랙쇼 (지은이) 서남희 (옮긴이) │길벗스쿨│ 2020│36쪽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이든 의젓하게 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난감 따위는 갖고 싶어 하지도 말고, 신난다고 소리치는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꾹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지요. 어른이니까요. 멋진 어른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멋진 어른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합니다.
그러나 사실 어른들 누구나 자기 안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어린 시절의 ‘나’인 아이를 품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기분이 좋으면 씰룩쌜룩 춤도 출 줄 압니다. 갖고 싶은 것도 많고, 쉽게 겁도 먹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른인 ‘나’는 어린 시절의 ‘나’로 인해 생각지도 않게 힘들 수도 있고, 속상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림책의 인물들은 풍부한 색채감과 큼직한 그림들로 표현되어 표정이 유쾌합니다. 의젓한 듯한 어른은 밝은 수채화로, 개구쟁이 어린 시절 아이는 흑백의 연필로 그렸습니다. 한 몸 안에 표현된 어른과 아이가 서로 닮았는지 위 아래를 비교하며 자세히 뜯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불쑥 튀어나와 나를 당황하게 만들어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들수도 있는 내 안의 아이로 오늘도 불안합니다. 어쩌겠어요. 그 아이도 잘하려고 하는 나인걸요.
4. 집착으로 인한 불안
≪관리의 죽음≫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지은이),고정순(그림), 박현섭(옮긴이), 이수경(해설) │길벗어린이│2022년│72쪽
어느 멋진 저녁, 체르뱌코프는 오페라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을 가득 안고 공연을 보고 있습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행복의 절정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행복해하던 그는 갑자기 튀어나온 재채기로 누군가의 머리에 침을 튀기게 됩니다. 그는 재채기가 튄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해 보지만 사과를 받아들이는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은 불안감에 여러 번 찾아가 거듭 사과를 합니다. 그때마다 상대방의 반응은 별로입니다. 기어이 계속되는 사과에 화난 상대방으로부터 “꺼져!!” 소리를 듣게 됩니다. 많이 상심한 체르뱌코프는 배 속에서 무언가 터져버리고 기어이 죽습니다.
세계적인 단편 소설의 대가이며 극작가인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이 고정순 을 만나 진한 블랙코미디 연극 한 편을 보여줍니다. 작품마다 다채로운 그림 스타일을 보여 주는 작가는 0.1mm 볼펜만을 사용하여 펜화로 그림책을 완성합니다. 촘촘하게 또는 거칠면서 과감하게 그려진 펜 선들은 아슬아슬한 체르뱌코프의 불안하면서 심약한 심리를 따라가게 합니다. 심지어 그림 일부가 수정액으로 지워져 있거나, 채 완성되지 않은 펜 선 자국들도 보입니다. 역시 불안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체르뱌코프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건 무슨 마음일까요?
어른 그림책 연구모임
어른그림책연구모임 – 손효순
그림책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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