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문 밖 출입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날, 문득 걸려 온 전화 한 통. 따뜻한 커피와 잘 익은 홍시, 구수한 보리빵을 따끈하게 쪄 놨으니 어서 놀러 오라는 이웃 어르신의 재촉. 망설임 끝에 집을 나섰습니다. 마침 내리던 빗발도 성글어지고 길가의 가로수는 새들의 떼창으로 떠들썩합니다. 빗물에 씻긴 새들의 맑은 지저귐이 답답한 가슴을 활짝 열어줍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아질 거야. 어느새 먹구름은 저만치 물러나고 파란 가을하늘에 새털 같은 흰 구름이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생색내지 않고 우연인 듯 넌지시 건네는 따뜻한 위로, 시간을 들여 마련한 마음의 선물, 값 없이 받아 누리는 자연의 선물. 그런 선물을 받아든 날은 뜻밖의 기쁨과 감사에 눈물이 찔끔 나도록 행복합니다.
『레미 할머니의 서랍』
사이토 린·우키마루 글, 구라하시 레이 그림 | 문학과 지성사 | 2022년 | 31쪽
홀로 사는 레미 할머니에게는 아끼는 서랍장이 하나 있습니다. 맨 아래 서랍에는 빈 쿠키 깡통과 사탕 병, 장미꽃을 묶었던 노란 리본, 쓰다 만 털실 뭉치, 작은 초콜릿 상자가 있습니다. 어느 봄날, 레미 할머니는 빈 사탕 병에 딸기잼을 정성껏 담고, 여름이 되자 유리병에 채소 피클을 가득 채웁니다. 가을에는 아기 고양이 목에 포근한 리본을 매어 주고, 빨간 털실은 겨울 장터를 찾은 레오 할아버지의 모자로 변신했네요. 이듬해 새싹이 움트기 시작하는 봄날, 꽃다발을 등 뒤로 감춘 레오 할아버지가 수줍은 목소리로 레미 할머니께 프러포즈를 합니다.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된 레미 할머니의 모습은 소녀 같습니다.
쓰임이 다한 물건들을 깨끗이 닦고 잘 간직해 두었다가 소중한 것들로 다시 채워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선물의 참된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할머니만의 공간에 의자가 하나 더 놓인 마지막 장면이 참 따뜻합니다. 구라하시 레이 특유의 편안하고 빈티지한 색감을 입은 그림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림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꼭 한 권씩 선물하게 되는 보석 같은 그림책입니다.
『린 할머니의 복숭아 나무』
탕무니우 지음, 조윤진 옮김 | 보림 | 2021년 | 31쪽
대만을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 탕무니우의 최근 작품입니다. 탐스런 복숭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 아래서 복숭아를 따고 있는 린 할머니의 모습이 온통 달콤한 복숭아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책은 온통 사랑스러운 분홍빛 세상이네요.
정성껏 키운 복숭아를 동물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고 딱 하나 남은 복숭아로 달콤한 복숭아 파이를 만들어 느림보 거북이에게 꽃잎 차와 함께 내놓는 린 할머니의 사랑에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맛난 복숭아를 먹은 동물들이 여기저기 싼 똥 덕분에 이듬해 봄, 린 할머니네 집 앞은 셀 수 없이 줄지어 선 복숭아나무에 활짝 핀 꽃들로 아름다운 꽃 대궐을 이룹니다. 산속에 비가 내리는 장면을 지나 이어지는 면지를 양쪽으로 쫘악 펼치면 ‘우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린 할머니의 나눔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일으켰네요. 꽃잎이 지면 달콤한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릴 거예요. 잘 익은 복숭아를 크게 한입 베어 문 듯 입가엔 달콤한 과즙이 줄줄 흐르고 가슴 속까지 복숭아 빛으로 발그레하게 물드는 참 예쁜 그림책입니다.
『바닷가 아틀리에』
호리카와 리마코 글·그림 | 김숙 옮김 | 북뱅크 | 2022년 | 32쪽
《바닷가 아틀리에》는 좀 안 좋은 일로 학교를 쉬며 방학에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아이가 일주일 간 화가 아줌마의 아틀리에에 초대되어 지내는 이야기입니다. 한 면의 대부분은 부드러운 수채화 그림이 가득합니다. 그림 한쪽에 단정하게 놓인 글은 할머니가 된 아이가 손녀와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은 소리로 읽다보면 할머니 방 한쪽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한 쪽 한 쪽 그림만 감상해도 좋을 이 그림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 장면입니다. 짙은 파란색으로 칠해진 바다 그림을 눈을 깜박이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시간 동안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바다를 둘러싼 초록의 숲으로 눈길을 돌리면 어느새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됩니다. 이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에는 두 사람이 함께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바다를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에서 단단해진 마음이 느껴집니다. 선물 같은 일주일의 시간과 소중한 인연의 공간, 《바닷가 아틀리에》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선물』
페이지 추 글·그림 | 이정주 옮김 | 우리학교 | 2021년 | 40쪽
미술관에 가실래요? 여기요, 티켓! 미술관은 지루하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웅이와 함께라면 괜찮을거에요. <선물>은 지루한 예술작품이 가득한 미술관을 선물로 만들어주는 그림책입니다. 웅이는 걱정은 없지만 행복하지 않은 아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시무룩한 웅이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빠가 선물한 미술관 티켓을 손에 들고 더욱 시무룩해집니다. 하지만 매미를 따라 들어간 미술관에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예술작품을 따라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
미술관을 선물하는 이 그림책은 어렵기만 한 예술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매표소 앞에서 웅이가 내미는 입장권에는 ‘open your eyes’와 ‘open your mind’라고 쓰여 있습니다. 미술관은 지루하고 어렵다는 색안경과 선입견을 걷어내는 마법의 주문과 같습니다. 이 주문은 비단 미술관에 들어가면서 외워야 하는 주문은 아닙니다. 낯설고 어려운 환경에 놓일 때도 눈과 마음을 덮고 있는 가림막을 거둘 수 있습니다. 미술관이 지루하고 어렵다고 느껴질 때, 오늘과 다른 날이 겁날 때 외울 수 있는 주문을 선물합니다.
“open your eyes” “open your mind”
어른 그림책 연구회
어른그림책연구회 – 김명희, 유수진
그림책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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