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을까

 

유난히 춥고 어두운 겨울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 더 이상 ‘쿠데타’나 ‘내란’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기에 12.3 ‘비상계엄’은 도무지 실제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생생한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고, 두 달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인 채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고 대한민국을 곤두박질치게 합니다. 계엄을 바로 해제시켰음에도 이럴진대, 만일 그게 성공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작가 한강의 기원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 것일까요?’ 그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구하며, 관련 그림책 3권 천천히 다시 음미해 보고자 합니다.


1. 『할아버지의 감나무』

서진선 글, 그림|평화를품은책|2019|38쪽

몇 년 전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적이 있는, 한국전쟁에 국군으로 참전했던 할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외손주인 아이의 눈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생전에 할아버지는 늘 새벽에 일어나 일기를 쓰신 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감나무 산에 오르셨지요. 손수 심고 기르는 감나무마다 이름표를 붙여주시고 온 마음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팔지도 않을 감나무를 왜 그렇게 힘들게 키우느냐는 할머니의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며 엄마가 할아버지 일기장을 읽어줍니다. ‘김의수’. 할아버지 감나무에 걸려있던 이름입니다. 젊은 날 할아버지는 그 사람을 적으로 만나 그에게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다가가 살펴보니 그 사람은 어른의 군복을 입은 빼빼 마른 소년이었습니다. 소년의 손에는 먹다 남은 감이 쥐어져 있고 주머니엔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있었지요…..

평생 전쟁의 악몽과 죄책감에 시달리신 할아버지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작가는 따스하고 잔잔한 노랑과 주황의 물감을 풀어 표지를 채색합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죽어간 수많은 병사들의 넋에 생명을 불어넣기라도 하려는 듯 감나무 산 전체를 초록 초록한 잎사귀로 물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뒤덮는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날, 할아버지를 떠나 보내드립니다. 글도 감동이지만 섬세한 감성과 진정성이 담뿍 배인 그의 색과 형상에서 더 많은 떨림을 느낍니다.

어떤 이들은 전쟁이 필요악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전쟁이 있었기에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곧 인간에게 전쟁은 불가피하거나 유익하다는 것이지요. 정말 그런 것일까요? 평화길찾기 03번인 이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인간과 전쟁, 그리고 평화를 다시 숙고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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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씩스틴』

권윤덕 글, 그림|평화를품은책|2019|40쪽

위안부 문제, 제주 4.3사건 등 우리 현대사의 비극들을 거침없이 그림책에 담아내고 있는 권윤덕의 작품입니다. 이젠 우리뿐 아니라 세계인들까지도 주목하는 ‘5.18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와 관련한 여느 책이나 영화와는 달리 당시 계엄군의 총이었던 M16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래서인지 계엄군의 잔혹한 만행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기보다는 무차별 총질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저항하는 시민들과 그들을 통해 갈등과 변화를 겪는 M16의 심리에 초점을 맞춥니다. 또한 그날의 참혹한 장면마저도 한 톤 낮춘 색조와 유려한 곡선을 사용하여 증오심을 폭발시키기보다는 차분히 상황을 들여다보며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처음 계엄군과 함께 폭도 진압에 투입되었을 때만 해도 M16은 용맹스러웠지요. 그들은 빨갱이 폭도인 적이었기에 골목 끝까지 쫓아가 그들을 해치웁니다. 그러나 아무리 최루탄을 퍼붓고 총을 쏴대도 꾸역꾸역 광장으로 몰려들며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는 그들을 보며 마음에 균열이 일기 시작합니다. 대체 저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총알이 제공되자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눕니다. 탄창에 총알을 가득 채우고 세차게 화약을 터트립니다. 문방구 아저씨가 쓰러지고, 가구 공장 청년이 쓰러지고, 교련복 입은 학생이 쓰러집니다. 피투성이 시체들 사이로 엄마를 찾아, 신랑을 찾아, 친구를 찾아 미친 듯 광장을 헤집는 시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M16은…

역사가 된 줄 알았던 이 이야기가 현재가 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때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했기에 죄스러웠고 후엔 혹여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덧나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습니다. 이마저도 언젠가부터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덤덤해지고 말았습니다. 12.3 계엄과 여전히 진행 중인 내란을 겪으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마음에 새깁니다. 『씩스틴』을 되풀이해 읽으며 그들에게 용서를 빌고 지혜와 용기를 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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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둠을 금지한 임금님』

에밀리 하워스부스 글, 그림|장미란 옮김|책읽는곰|2020|40쪽

권력과 여론 조작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돋보이는 에밀리 하워스부스의 데뷔작입니다. 출간되자마자 워터스톤즈 어린이책상 우수상을 수상하고,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평단과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지요.

옛날에 어둠을 무서워하는 사내아이가 살았답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은 많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나 이 아이는 임금이 될 아이였고, 임금이 된 후 어둠을 금지하겠다고 생각했기에 문제였습니다. 아이는 임금이 되자 신하들을 불러 진짜로 어둠을 금지하겠다고 말합니다. 신하들은 깜짝 놀라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임금은 고집을 꺾지 않았지요.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백성들 스스로 어둠을 싫어한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 여론을 조작하기 시작합니다. 어둠은 지루해, 어둠은 무서워, 어둠은 우리가 가진 것들을 훔쳐가지…. 이제 그 나라엔 하루 스물네 시간, 일주일 내내 창이 환하고, 날이 새도록 축제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점차 피곤을 느끼게 된 백성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어둠을 되찾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불을 끄면 어둠 단속반이 찾아와 벌금을 물리는 바람에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참다못한 백성들은 드디어 한데 뭉쳐 데모하는데….

오늘 우리 상황과 너무 흡사해 소름이 돋습니다. 2년 전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토론용으로 딱 좋은 책을 발견해 기쁨이 앞섰는데 말이지요. 전혀 이치에 맞지 않고 비상식적인 주장과 선언에 누가 동조할까 싶은데 수많은 이들이 이에 휩쓸리는 것을 보며 ‘세뇌’의 무서움을 봅니다. 한 나라 최고 지도자의 어리석은 판단과 아집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망칠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백성이 뜻을 모아 다 함께 일어설 때 임금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음을 목도합니다. 대한민국이 휘청이고 있는 이 겨울, 모든 이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함께 이 책을 읽으며 큰 힘 얻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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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남용
 


어른 그림책 연구모임

어른그림책연구모임 – 백화현
그림책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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