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같은 삶

 

있을 법한 일을 꾸며 쓴 글을 소설이라고 한다. 세상을 오래 살다 보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란 없고,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없음을 알게 된다. 해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을 받아들이게 된다 ‘내 인생은 왜 이래’에서 ‘내 인생도 만만하지 않았어’ 정도로 객관화도 되고, 다른 사람의 고단한 삶을 들여다볼 여유도 생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허용의 범위가 넓어져서 좋기도 하다. 신기하거나 신나는 일도, 크게 웃을 일도 줄어들지만, 가슴이 뻐근함이 즐거움보다 더 크게 느껴진 젊은 날보다는 평안하다. 소설 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이 있는 책을 모았다.


1.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다산책방∣2022년∣612쪽

100년도 넘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를 조망하고 구현한다는 건 대단한 노력과 관심과 통찰과 능력이다. 외할아버지께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작가는 9살에 미국에 건너가 먼 이국땅에서 성장했다. 그런 그가 한국 근대사를 조망한 방대한 서사를 완성했다. 마치 큰 봉우리 위에서 산 전체를 조망하며, 그 산이 만들어진 과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듯하다. 산이 만들어지려면 관목이나 개척 식물 같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들이 토양의 기반을 잡고, 생명이 뻗어갈 자양분을 만든다. 그 자리에 교목이 성장하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묵묵하게 끝없이 세를 확장해 큰 산을 만들어간다. 작가는 폭넓고도 깊이 있는 서사로, 우뚝 선 교목 같은 사람들의 가치만이 아니라, 숲의 생명을 지켜주는 관목 같은 민초들의 가치를 구현했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런 통찰은 세월이 주는 것이 아니라 절실함과 사랑에서 시작되고 노력과 실천으로 확장됨을 이 젊은 작가가 보여준다.

대단한 서사도 굴곡진 역사도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하면 그 인물 크기만큼 표현된다. 이 소설은 먹고 살기 위해 기생이 된 옥희를 중심으로, 신산했던 일제 강점기 격동하는 근대사를 그리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호랑이와 맞서는 사냥꾼의 당당함과 강단은 격동기에 내몰렸던 우리 선조의 모습과 겹친다. 절대적 우위의 호랑이라도 작은 야수의 눈빛에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곳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라고 말한 저자가 한국의 근대사가 고리타분한 역사가 아니라 현실의 한 부분이라 했다. 어느 시대든 견뎌내야 할 삶의 무게가 주어지니까 사랑의 대상이 없이 한평생 살기는 어렵다. 나라를 빼앗긴 그 시절, 힘없는 자들이 야수가 되어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존재했다.

대 서사를 접하면 몸집이 부풀려지는 기분이다. 거인이라도 된 듯 성큼성큼 걷게 된다. 시간을 거슬러 꿰뚫어 사고하고 내게 주어진 현실을 통찰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주어진 현실이 다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믿음은 힘든 현실을 이겨내게 하는 기운을 줄 수 있다. 어차피 살아가야 할 세월이라면 꺾이지 않고 맞서면서 견뎌보고 싶게 한다. 대하소설이 주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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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문학동네∣2019년∣325쪽

3월에 소개한 <밝은 밤>의 저자 최은영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긴 호흡이 필요한 장편이 주는 묵직하고 깊은 울림, 단편 소설이 주는 한 방의 매력 모두 느끼게 하는 작가다. 편안하게 읽히는 데 불편한 진실로 마음이 아려온다. 한 편 한 편 모두 다양한 색깔로, 작가의 메시지가 날카롭고 강해 가슴에 진동을 준다. 책을 덮고도 그 진동으로 오랫동안 생각했다.

2017년 젊은 작가상을 받았다는 <그 여름>은 등장인물이 몰두한 사랑이 청소년기의 어설픔과 불안함을 보여준다. <601, 602>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 남존여비로 인한 상처받았던 많은 여자와 그 주변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을 끄집어낸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까운 친구가 아주 다르게 느껴질 때의 낯섦과 당혹감이 잘 묘사된 <모래로 지은 집>은 누군가를 이해했다는 생각의 오만함을 알게 해주고, 친구라는 존재와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작가의 문체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처음과 끝의 긴장감이 팽팽하고, 편안한 평범함이 있음에도 고급스럽고 우아하다. 구성 역시 주제로 접근이 가능하도록 돕고, 열린 결말들이 자연스럽게 작가의 생각에 스며들게 한다. 그뿐 아니라 전개의 자연스러움은 작가의 감정이 지극히 미세함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미처 돌아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했던 감정들에 주목하게 한다.

<아치디에서>등장인물들은 가족을 등지고 먼 타국 땅에서 만난다. “한심하게 사는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심하게라도 살기까지 얼마나 힘을 내야 했는지, 마침내 배가 고프고 몸을 움직일 수 있고 밖으로 나갈 힘이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라고 말한다. 작가의 말처럼 내게 무해한 사람을 만나고 내가 누군가에 무해한 사람이 되는 것이 가치 있음을 느끼게 했다. 읽는 내가 가슴이 툭 내려앉았다. 누군가를 오래 생각하고 사랑하면 그들의 아픔을 볼 수 있기를, 그의 아픔이 힘들다고 거부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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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돌이』

김미경 지음∣어나더북스∣2024년∣304쪽

다큐멘터리 영화 ‘정돌이’가 책으로 나왔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이야기가 소설로?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다큐멘터리 내러티브라고 소개한 이 책을 마치 옆에서 말을 듣는 기분으로 단숨에 읽었다. 중간중간 실제로 인물인 정돌이의 사진들이 없었더라면, 장르가 당연하게 소설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술 취한 아버지의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정돌이의 어린 시절은 그 어느 소설 인물의 삶보다 지독스럽다. 그런 아버지가 있는 지옥 같은 고향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 서울, 수배 중인 대학생과의 인연으로 고려대 정경대학 캠퍼스에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잠들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고, 1980년의 낭만과 정의와 함께 성장한다. 그가 장구 장인이 되어, 2016년 새해맞이 촛불집회에서 합동공연을 하는 모습은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소설보다 더 소설같이 극적인지 보여준다.

다른 각도에서 여전히 냉혹한 지금의 현실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다 보니 지난 시간이 자꾸 흐릿해진다. 해를 거듭하고 나이가 한 살씩 더해가면서, 과거 정권의 무자비함도 가물가물하고 그에 맞서느라 서로에게 보여준 온기도 잊었다. 그리고 그 시절 독재 정권 연장선상에 지금 우리를 옥죄고 있는 현실이 상기되었다. 그 가혹함에도 따뜻한 마음들이 모여 그 시기를 버텼듯이 지금 역시 우리는 다른 색깔의 연대를 통해 이겨나가고 있다.

살아있는 인물의 일대기를 글로 쓰려고 작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을까! 방송 작가의 이력이 없다면 불가능할 글의 형태가 처음엔 낯설었다. 하지만 사물을 하고 장구를 치는 정돌이가 다큐에서 음악으로, 몸짓으로 표현된다면, 이 글은 그 몸짓이 완성되기까지의 숨은 이면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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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애라

숭곡중학교 국어교사. 전국학교도서관모임 전 대표. 서울학교도서관모임 회원.
책을 통해 성장한 저는 책과 함께한 시간들이 소중해서, 평등하고 온기가 넘치는 학교도서관을 꿈꾸었습니다. 성찰이 있어 평안한 60+의 인생을 향해 오늘도 책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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