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境界)에 서서

 

1960년대 우리나라는 경제불황을 이겨내고 외화를 벌어들이고자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를 대규모로 파견하였습니다. 지독한 인종차별을 겪으며 미국이나 선진국에서 힘들게 돈을 벌어 가족의 생계를 꾸린 이들도 있습니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주변에는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들어와서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일들을 하면서 돈을 벌어 고국에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때 땅 설고 물 설은 곳에서 겪었던 서러움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아울러,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 오늘 밤에도 노숙해야 하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 사회가 조금만 더 팔을 크게 뻗어 받아들일 때,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요? 경계를 넘나드는 네 권의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1. 『도착』

 숀 탠 (글·그림) │ 사계절 │ 2008년 │ 136쪽

떨어져 나간 가죽 장정 표지에 여행 가방을 들고 머뭇거리며 나타난 남자, 혀를 날름거리며 그를 맞이하는 동물 한 마리. 『도착』은 왠지 불안하고 어두운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면지에서 여권 사진 크기의 흑백 초상화 60장과 마주칩니다.
Ⅰ부에서 Ⅴ부까지 이어지는 글 없는 그림책은 독자를 낯선 나라로 초대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야 하는 남자. 망망대해를 지나 드디어 도착한 ‘새 나라’는 눈부시게 환한 조형물로 이민자들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까다롭고 굴욕적인 입국 심사가 시작됩니다. 낯선 나라에 발을 딛기도 전에 남자는 만신창이가 되어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힌 열쇠를 건네받고 첫날 밤을 보냅니다. 배정받은 숙소는 닭 사육장을 방불케 할 만큼 낡고 초라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정착한 남자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편지를 쓰고 아내와 딸을 만나서 단란한 아침을 맞이합니다. 딸은 아빠의 심부름을 하다, 길을 묻는 ‘이방인’에게 친절하게 안내해 주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여전히 뭔지 모를 낯섦에 방황하는 독자들에게 그가 쓴 『이름 없는 나라에서 온 스케치(도착의 세계)』는 ‘이방인’ 독자를 위한 친절하고 디테일한 안내서가 되어 줍니다.
『도착』 은 2006년 볼로냐 라가치 특별상을 받은 숀 탠의 대표작입니다. 숀 탠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아버지와 영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3세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작품들에는 소속의 경계에 선 사람들, 문화적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관심이 녹아 있습니다.


#숀탠 #도착(TheArrival) #일러스트 #이민자 #이주노동자 #어른그림책연구모임


2. 『엄마가 수놓은 길』

 재클린 우드슨 글 허드슨 탤벗 그림 │ 주니어 RHK │ 2022년 │ 48쪽

엄마는 말했습니다. “거기 길이 있단다, 얘야. 거기 길이 있어.”
『엄마가 수놓은 길』 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농장에서 노예 아이들을 보살피는 왕할머니부터 토시 조지아나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퀼트 조각을 이어 붙여서 만드는 형식으로 세대에 걸친 이야기를 펼쳐가는 방식이 독특하고 아름습니다. 일곱 살 때, 가족과 헤어져 노예로 팔려 온 수니의 증조할머니는 엄마가 준 헝겊 조각과 바늘 두 개, 붉은 색실만 몸에 지니고 농장에서 일합니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왕할머니로부터 색실로 달과 별, 그리고 길을 수놓는 법을 배운 수니의 증조할머니는 자신의 아이에게도 그대로 가르쳐 줍니다. 조각보 비밀 지도는 그들에게 꿈과 미래를 열어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그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었고 자손 대에 이르러서는 자유롭게 성경책을 읽을 수도 있게 됩니다. 캐럴라인과 앤은 흑인과 백인을 따로 살게 만든 법을 바꾸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 행진합니다. 할머니의 조각보는 아이들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행진하지 않아도 되었고, 할머니처럼 책을 많이 읽고 엄마처럼 글을 많이 쓰며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칠흑 같은 어둠, 앞이 보이지 않는 벼랑 끝에서도 꿈을 노래하고 다음 세대에게 길이 되어 준 부모 세대가 있었기에 자손들은 또 다음 세대를 사랑으로 키우고 그들이 걸어갈 길을 희망과 꿈으로 수놓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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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커다란 포옹』

 제롬 뤼예(글·그림) │ 달그림 │ 2019년 │ 40쪽

아빠가 둘! …그리고 나는 나의 두 번째 아빠가 우리를 팔로 꼭 안아 주는 게 정말 좋아요!
작고 동그란 주황색 동그라미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노란색 아빠, 빨간색 엄마. 그 사이에서 태어난 주황색 귀염둥이 나. 하지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또 다른 색깔의 아빠를 받아들이고 나와 다른 형제자매를 만나 이전과는 다른 색깔의 가족들이 한 지붕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야기가 많은 걸 생각하게 해 주는 그림책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도 다문화사회로 성큼 들어섰습니다. 피부색과 출생지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결혼하기도 하고, 부모의 이혼으로 새로운 가족 형태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아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상황 속에서 서로 생채기 내고 깨지고 밀어내기보다는 팔로 꼭 안아 주는 커다란 포옹은 얼마나 따뜻하고 든든할까요?
프랑스 작가인 제롬 뤼예는 여러 어린이책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왔는데 책의 내용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하찮은 네 개의 작은 귀퉁이》, 《아빠, 엄마, 아누크 그리고 나》 등의 작품이 그러합니다.


#커다란포옹 #제롬뤼예 #가족 #달그림 #어른그림책연구모임 #아이


4. 『영이의 비닐우산』

 윤동재 시·김재홍 그림 │ 창비 │ 2005년 │35쪽

주룩주룩 비 내리는 월요일 아침, 학교 가는 길에 영이는 비를 맞으며 시멘트 담벼락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거지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짓궂은 아이들이 할아버지 어깨를 툭 건드려보며 지나가고, 문방구 아주머니는 미친 영감태기가 아침부터 재수없게 자기집 담벼락에 기대어 늘어졌다고 악담을 해댑니다. 아침 자습을 마치고 영이는 비닐우산을 할아버지 위에 살며시 씌워 드립니다. 돌아서서 비를 맞으며 뛰어가는 영이의 뒷모습이 참으로 장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날 오후는 하늘이 말갛게 개고, 영이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담벼락을 살펴보니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담벼락 한 켠에 비닐우산만 다소곳이 세워져 있습니다.
지금은 찾아보기도 힘든 ‘비닐우산’이 작품에 등장한 건, 1980년대 윤동재의 시를 바탕으로 김재홍이 그림을 입혀 탄생한 그림책이기 때문입니다. 비닐우산 하나의 온정, 따뜻한 밥 한 끼의 힘만으로도 어려운 이웃은 다시 일어설 힘과 용기를 얻게 되지 않을까요? 영이의 시선을 따라가며 바라본 비 오는 날 풍경이 새롭게 다가온 그림책입니다. 무심한 듯 내리는 빗줄기, 대놓고 조롱하는 아이들과 사람들의 모습은 온통 잿빛 무채색인데 영이의 옷만큼은 밝은 노랑입니다. 영이가 건네는 우산도 밝은 초록이고요. 세상을 밝히는 작은 몸짓이 세찬 빗줄기를 말끔히 거둬들이는 참 따뜻한 그림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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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그림책 연구모임

어른그림책연구모임 – 김명희
그림책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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