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시 한잔 어떠세요?

 

 무얼 하든 좋은 계절 가을입니다. 가벼운 복장으로 운동하기 좋고, 일상을 떠나 여행하기 좋고, 차 마시며 책을 읽기 좋고, 무엇보다 익고 바래가는 순해진 풍경을 바라보며 사색에 빠져들기 딱 좋은 계절입니다. 뜨거운 계절을 잘 겪어낸 우리에게 어느 때보다도 다정한 햇살과 바람을 보내 다독여 익어가게 하는 가을입니다. 10월, 사유의 계절에 우리를 익어가게 할 시 그림책 4권을 소개합니다.


『대추 한 알』

장석주 시, 유리 그림|이야기꽃|2015년|32쪽

하늘색이 짙어지는 요즘, 집을 나서다 아파트 화단에서, 골목길 담장 위로, 공원을 거닐다가 붉게 물든 대추를 본 적 있으신가요? 그동안 그곳에 있는 줄도 몰랐던 이 작은 열매가 가을이 되자 제법 굵고 붉게 영근 모습으로 갑자기 눈에 든 적이 있지 않나요? 오늘은 대추 한 알을 노래한 시 그림책 『대추 한 알』을 소개하려 합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이 시는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입니다. 2009년 가을, 교보빌딩 ‘광화문 글판’에 걸려 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시이지요. 시 그림책 『대추 한 알』은 바로 그 시와 그림작가 유리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어우러져 펼쳐진 작품입니다.
시인은 ‘대추 한 알’ 안에 들어있는 태풍과 천둥과 벼락의 개수를 세고, 무서리 내리고 땡볕 쏟아지며 초승달 뜨고 진 날들을 헤아려 대추 한 알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8줄의 시로 담아내었습니다. 그림작가는 시의 행간에 담긴 길고 긴 서사를 한 편의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그려 내었습니다. 가을볕에 영글어가는 대추가 눈에 들어왔다면, 시 그림책 『대추 한 알』을 펼쳐보시길 추천합니다. 제철인 햇대추 몇 알을 곁들이시면 더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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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린다』

함민복 시, 한성옥 그림|작가정신|2017년|52쪽

함민복 시인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에 수록된 시 「흔들린다」와 한성옥 작가의 그림이 어우러진 시 그림책입니다.
참죽나무의 가지를 치는 과정에서 나무를 바라보며 넋두리하듯이 던지는 말들이 묵직한 시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삶을 옮기는 번역가”라고 말한 함민복 시인답습니다. 사선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하늘 아래, 위태로워 보이는 한 그루의 나무가 보입니다. 우리나라 1세대 그림책 작가가 그린 흔들림의 중심에 있는 나무, 부들부들 몸통을 떨고 있는 모습은 마치 시어를 머금고 있는 듯합니다.
조근 조근 낭독해보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가만가만히 시와 그림 사이, 그림책 속 여백에 머물러보시면 좋겠습니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려 왔던 나, 우리들의 이야기가 스멀스멀 올라올 듯합니다. 마음의 껍데기를 톡톡 두드리는… 내적 울림이 있는 순간을 마주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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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 점 반』

윤석중 시, 이영경 그림|창비|2004년|36쪽

시계가 귀하던 시절, 엄마의 심부름으로 단발머리를 한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가겟집으로 시간을 물으러 다녀오는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표현한 시 그림책입니다. 1940년 윤석중 선생님의 동시 《넉 점 반》을 이영경 그림작가의 해석으로 우리 고유의 색채를 잘 살려낸 수작입니다. 담백하면서도 맛깔나게 표현된 그림은 자연과 삶이 어우러져 살아가던 그리운 시절을 잘 담아냈습니다. 주인공 아이의 시선과 동선을 따라 책장을 넘기다 보면 마치 오래된 사진첩에서 빛바랜 가족사진을 발견한 것 같은 반가움과 친근함 그리고 왠지 모를 그리움마저 들게 합니다.
천연덕스럽고 낭만이 가득한 시 그림책 『넉 점 반』은 고유의 리듬감으로 저도 모르게 “넉 점 반, 넉 점 반…” 주문처럼 따라 외우게 됩니다. 빛바랜 한지에 그린 듯한 옛 풍경 그림을 보고 있자면, “넉 점 반, 넉 점 반” 돌담길을 따라 걷고, “넉 점 반, 넉 점 반” 노는 아이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오밀조밀 모여앉아 밥을 먹던 그리운 저마다의 시절로 끌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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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

공광규 시, 주리 그림|바우솔|2016년|40쪽

여린 생명들을 밟지 않으려고 맨발로 산행한다는 공광규 시인, 그 따뜻한 마음이 담긴 글로도 충분하다 여겼습니다. 특별한 감성과 분위기를 자아내는 주리 그림작가의 손길이 더해져 매력적인 그림책으로 재탄생되었습니다.
압축적인 시의 맛을 음미하면서, 매화나무, 벚나무, 조팝나무, 이팝나무의 봄꽃들을 피어나는 순서대로 감상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동그란 밥상에 소박한 반찬. 꽃무늬 바지, 손 때 묻은 사물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할머니를 떠올리게 됩니다. 어르신의 희끗해진 머리 위에 내려앉은 겨울눈 같은 봄꽃, 노을 속에 서 계신 뒷모습에 진한 여운이 남습니다.
제목은 흰 눈이지만 펼쳐지는 풍경은 꽃눈입니다. 마치 첫눈처럼 설레이게 할 풍경을 제대로 마음에 담고 싶다면 찬찬히 들여다보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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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그림책 연구회

어른그림책연구회 – 오현아, 변영이
그림책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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