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의 길 걷기

 

청소년 시기에 한국 현대문학에 빠져 식민지 시절을 간접 경험했었다. 같은 작가 작품을 찾아 읽다 보면 주인공 이름도 비슷하고 결국 작가가 살았던 시대, 그 작가의 삶이 보여 그 시대가 느껴지곤 했다. 근·현대 소설에 등장하는 경성(서울)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 글을 쓴 작가들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곳을 그 시절 문인들을 상상하여 걷고, 살펴볼 수 있도록 그 시절의 작가를 소개한 책들을 읽으니 새삼 그 공간이 더 특별해진다. 소설 작품 속 배경이, 지금 내가 살고 있거나 여전히 걷고 있는 길이라면? 내친김에 모아서 읽어보고 다시 그 길을 걸어보자.



『서울문학기행』

방민호 ∣ arte ∣ 2017년 ∣ 373쪽

한국 현대문학 작가 및 작품연구에 주력한 저자는 특히 경성 모더니즘과 해방 후, 8년의 문학사 연구에 관심을 두었다고 프로필에 적었다. 이 책은 그러한 작가 연구의 정수를 담고 있다. 1934년 경성의 전차 노선표가 실려있는데, 조금만 관심 있게 보면, 경성 전찻길을 중심으로 번화했던 거리가 보인다. 드라마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도 그 흔적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1925년에 경성역(서울역), 1926년에 경성부청(서울시청)이 완공되었다 한다. 격변하는 시대에 무엇인들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겠지만 근대 건물로 인한 공간적 변화는 그 시대를 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910년생 박태준과 그 시기의 이상, 이태준은 같은 공간에서 동선이 늘 겹친다. 이미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던 이광수, 정지용, 한용운 역시 이 책 속에는 덜 보이지만 변화된 경성이 한국 현대문학을 이끈 작가들의 삶에 끼친 영향이 짐작이 간다. 일제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500년 조선의 단절을 꾀했고, 식민지 도시형성 과정도 그 차원이었음을 저자의 연구를 통해 밝히고 있다.
소설가 구보가 대학노트를 끼고 도시 탐구를 하러 나서,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을 기록한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경성역은 식민지적 현실을 보여주는 많은 군상들이 등장한다. 사소설, 자전적 소설이라 평가되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구보가 경성역 근처에서 만나는 친구는 김기림, 이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도 있고, 이 둘과 구보가 나누는 이야기 역시 그 시절 문인들의 모습일 수 있다. 구보가 산책을 하는 곳은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남촌을 피해 주로 북촌인 것도, 소설 마지막 글귀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서 소설을 써야겠다 중얼거리는 대목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식민지 폭압의 절정에, 문인들이 느꼈을 절망을 표현하고 있다고 저자는 해석했다.
서울이 배경이 되어 근·현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표현한 작품을 읽고, 그 공간을 탐방하는 문학기행을 해보자. 식민지 시절의 우리 문인들의 마음도 느껴보고 지금을 사는 서울 시민으로, 때론 그 시절을 다룬 작품을 가르치는 교사로, 서울을 걷고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럴 때 읽고 나서면 도움이 될 만한 책 한 권이다.


#서울 #경성 #구보 #김기림 #이상 #화신백화점 #전차 #1930년 #경성역 #경성부청 #소설


『서울 이야기』

김남일 ∣ 학고재 ∣ 2023년 ∣ 427쪽

소설가가 지난 시절의 소설가들을 말한다. 고증을 거치지만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그 시절 그들의 생각과 업적과 흔적을 찾는다. 소설로만 만난 작가들을 또 다른 작가를 통해 다시 만나니 어렵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하지만 분명 그들이 생존했던 시기는 지금부터 100년도 되지 않은 시기다. 지금 우리는 그들이 다녔던 바로 그 길을 걷고, 그들이 살았던 공간에 살고 있다.
염상섭의 소설에서는 1924년 서울의 홍수가 잘 묘사되어 있고, 급격하게 늘어나는 일본인의 모습도 박태원의 <천변풍경>에서 이발소 소년의 눈으로 관찰되어 묘사된다. 남촌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나중에 북촌으로 진입하는 일본인을, 염상섭 <삼대>에서 김병화가 돈 400원으로 일본 사람의 동네가 되어가는 효자동의 식료품 상회를 구입하는 장면에서 생생하게 표현된다. 이러한 내용은 작가의 엄청난 독서량으로 가능한 설명이고, 객관적인 자료 분석의 결과이기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책 내용 중 내가 살고 있는 성북동이 나온다. 이곳은 1930년대는 성저십리(도성으로부터 십리)로 북촌과 가깝고 북한산 자락 아래 일찍이 예술가들이 모일 만큼 풍광이 좋아 문인들이 많이 살았다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들의 흔적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태준이 우리 한옥의 미를 살려 정성스럽게 지은 가옥인 수연산방(壽硯山房)은 아직 그 모습을 많이 유지하고 있어, 문학기행이라도 할라치면 빠지지 않고 쉬어가는 장소이다. 이태준 단편 『달밤』에서 성북동을 시골스럽다 표현한 대목이 나온다. 성북동은 변화하는 경성에서 그래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서 문인들이 이곳을 더 사랑했을 것이다
이 책 한 쳅터인 ‘대경성의 산책자들’ 편에는 ‘소설가 상허씨의 일일’이라는 소제목으로 이태준이 산책하는 장면을 적었다. 문장지의 편집장이었던 이태준을 상상하고, 그 당시 건물인 예술가들의 인기 카페였던 ‘낙랑파라’를 자세하게 묘사한다. 실명의 소설가들의 일상을 묘사하니 사실인지 소설인지 구분이 애매해 혼동스럽긴 하지만 소개한 화신백화점 맞은편 한청빌딩을 찍은 사진까지 있어 그 당시를 상상하기는 그만이다. 경성을 관찰한 이는 박태원 소설 속 인물, 구보씨를 빼 놓을 수 없다. 구보씨의 산책 경로야 말로 북촌 중심으로, 식민지 경성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박태원 작가의 장편 『천변풍경』에서는 여러 인물의 입을 통해 식민지의 경성에 사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과 짝을 이루는 도쿄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한다. 그 책까지 읽어본다면 그 당시를 더 느낄 것 같다.


#경성 #서울 #상허이태준 #종로 #북촌과남촌 #박태원 #성북동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허병식, 김성연 ∣ 터치아트 ∣ 2009년 ∣ 335쪽

서울문화재단이 ‘서울문화예술탐방’을 시작해 그 결실을 책으로 묶었다. 답사지를 선택할 때 읽으면 코스부터, 그 지역이 나와 있는 책과 저자까지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어 매우 유용하다. 12개의 산책 코스는 대부분 한강 북쪽으로, 500년 역사의 조선과 근대를 거쳐 식민지 서울을 문학 작품과 연결하여 소개하고 있다. 소설로 읽은 이야기가 우리 역사의 모습과 어우러져 우리가 걷고 있는 그곳의 의미를 더한다. 각 장에 산책코스를 지도로 그려 넣었고, 관련된 작품들을 정리한 이 책은, 읽고 나서 떠나도, 떠나기 전 읽어도 답사에 기대 이상의 감동을 줄 듯하다.
이 책 ‘모던보이 뒤를 좆아 남촌을 걷다’에서는 이상의 날개에 나오는 미쯔꼬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시작해, 경성 최고의 번화가인 혼마치1정목(소공동)과 구보의 산책 길에 두 번이나 나온 조선은행(한국은행)이 나온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고, 1930년 이곳에서 전차를 타고 내린 구보의 행적을 찾아보자. <꺼삐딴 리>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반도호텔 자리와 1914년 환구단을 헐고 지었다는 한국 최초의 웨스턴조선호텔은 이태준의 <사상의 월야>에서도 보인다. 을지로 2가를 지나 걷다 보면 한국 카톨릭의 성지인, 최초의 고딕양식 건축물이자 1980년 민주화운동의 집회 장소로서도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 되어 있는 명동성당을 만난다. 남산 산책코스는 경성역(현 서울역)으로 이어지고, 고궁과 함께 걷기 좋은 길 정동길은 근·현대 건물이 많이 남아 있어, 이 책을 읽고 둘러본다면 건축물이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경복궁에서 시작해서 지금의 청와대까지의 산책코스는 꼭 서울에 살지 않은 사람들도 나들이로 찾는 길이다. 이 일대는 각자가 더 의미 있는 장소를 선택해서 둘러볼 만한 많은 장소들이 숨어있다. 서촌에서는 윤동주의 흔적도 있고, 이상의 집도 있다. 문학과는 거리가 먼 권력의 기운도 느낄 청와대가 개방되어 서촌 길에서 출발했다면 내친김에 둘러볼 수도 있다. 방향을 틀어 종로로 가보자. 우리 자본으로 북촌에 건립된 최대의 건축물이었던 화신백화점은 종로타워로 변신해서도 여전히 종로의 랜드마크로 존재한다. 종로3가역과 연결되어, 지하부터 꾸며져 있고 종로 서적도 있지만 지금은 스타벅스가 너무도 거대하게 2층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흡수한다. 자본은 또 다른 권력으로 지금의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아 약간 씁씁하지만 볼거리는 풍부하다.
길을 걷다 보면 과거도 보이고 미래도 보인다. 문학도 보이고 자본의 흐름도 보인다. 과거가 있어서 미래가 오고, 미래가 있기에 과거가 존재하듯, 문학이 우리 삶을 표현했음을 느끼는 답사길이 될 것 같다.


#서울 #문학거리 #화신백화점 #종로타워 #박태원 #이상 #남촌 #북촌 #종로타워_스타벅스 #서촌


강애라

숭곡중학교 국어교사. 전국학교도서관모임 전 대표. 서울학교도서관모임 회원.
책을 통해 성장한 저는 책과 함께한 시간들이 소중해서, 평등하고 온기가 넘치는 학교도서관을 꿈꾸었습니다. 성찰이 있어 평안한 60+의 인생을 향해 오늘도 책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