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하고 싶은 강연이 있다. EBS 교양, <나의 두 번째 교과서 국어 > 나민애 교수, 제3강 강의이다.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명쾌하고 깊이 있게 다룬 강연이다. 강연을 너무 재미있게 들어, 이 주제로 서평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연자는 소설을 읽는 이유로 두 개를 꼽으라면, ‘인간하고 세상을 알고 싶고, 재미있어서’로 들었다. 소설은 작가가 작정하고 말하려는 주제가 있고, 독자는 그 주제를 접하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거나 만남을 한다는 취지의 말을 설득력 있게 했다. 강연자의 말처럼 나 역시 소설을 읽는 이유가 내 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타인의 인생을 엿보고 ‘인생 탐구의 보고서’로 소설의 재미를 만끽했다. 이 서평에서는 지금의 내가 소설을 통해 만난 세상과 그로 인한 재미를 풀어보고자 한다. 소개한 강의도 찾아 듣기를 권한다.
1.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 233쪽
90년대 대표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2020년에 펴낸 단편 모음이다. 다소 말이 어렵지만 출판사 책 소개 대목을 인용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인칭 화자의 정체성과 그 역할이다. 일정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하루키 월드 속의 ‘나’는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며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는 한편으로 비현실적인 매개체를 통해 저도 모르는 사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그와 함께 읽는 이들을 깊은 우물과도 같은 내면으로 끌어들인다’고 작품을 설명했다. 각 단편을 관통하는 주요한 주제는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라는 설명이다.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출판사 설명을 빌려 표현하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각 단편 속 일인칭 화자가 비현실적 매개체를 통해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한다. ‘찰리 파커’에 관해 실재하지 않은 음반 이야기, 연주회 초대를 받았지만, 연주회는 없었던 이상한 경험, 심지어 말하는 원숭이와의 만남까지 기이하지만, 묘한 설득력이 있다. 소설의 배경과 시대는 중요하지 않다. 시대적 특성도 내용을 지배하지 않는다. 묘한 감춤이 있는 전개는 일본 특유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어 전개된다. 평범한 소설 속 나는, 이상한 체험을 하지만 왜 그런 상황이 펼쳐지는지 당위성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품 속 평범한 나는 일상적이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나와 다른 인간 탐구를 한다. 번득이는 재치가 다소 기이함을 굉장한 매력으로 끌어올리고, 읽는 이들에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짧은 단편이 주는 흡인력 또한 대단해서 단숨에 읽고 생각하게 하고 깨알 같은 재미까지 준다.
소설을 구성하는 3요소로 인물, 사건, 배경을 든다. 소설을 읽으면 내가 속하지 않은 배경을 경험하고, 살고 있지 않은 시대도 엿보게 한다. 내 주변이 아닌, 접하기 어려운 인물을 만난다. 당연하게 겪지 않을 사건도 글 속에서 겪는다. 그래서 짐작하고 감지하고 상상한다. 현실에서는 내가 결코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세상도 접한다. 글을 읽는 행위가 이런 짜릿한 재미를 주고, 상상을 펼치게 하는 매력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이리라.
2.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 103쪽
옮긴이의 말 말미에 ‘구체적인 해석은 독자에게 맡기면서 정확한 단어 선택으로 분위기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클레어 키컨의 글은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처럼 아름답다’고 이 글을 설명했다. 번역가는 제2의 작가라는 말이 실감 나는 표현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함축적이고 여백이 많은 문체에 매료되어 낯선 나라, 모르는 시대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했다. 그 옆에서 주인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영상물은 연출자의 의도가 화면과 소리와 연기 등으로 구현되어, 상상하고 짐작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덜하다. 하지만 소설은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고, 어떤 때는 가려진 안개 속 그 너머를 봐야 해서 피곤하기도 하다. 물론 짐작하고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영상과 또 다른 매력이 소설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1981년 아일랜드가 배경인 이 소설은 그 당시를 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혼란하고 궁핍한 시대를 느끼게 한다. 아이들은 일정 기간 어른들로부터 돌봄을 받아야 하고, 그게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하지만 시대적 혼란함과 어려움은 그 당연함을 어렵게 한다. 이 소설은 아이들의 돌봄이 당연하지 않은 혼란기 아일랜드가 배경이다. 어려운 형편의 부모는 먼 친척 집에 아이를 맡기는데, 가정에서 돌봄을 받지 못한 아이는 그곳에서, 받아야 할 배려와 사랑을 느낀다. 배려와 사랑의 경험이 특별했고, 특별함을 선사한 어른에게 신뢰와 고마움을 느낀다. 돌봄을 받고 나서야 사랑받는 느낌을 알게 되는 아이의 심리가 마음에 와닿고, 사랑의 모습을 유려하게 보여주는 친척의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와 기쁨을 독자인 나는 느꼈다.
소설은 간결한 전개로, 분량도 100여 쪽이지만 낯선 시대, 공간을 엿보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또 같은 시대를 살지만 각기 다른 인간의 태도와 가치관을 통해 인간의 다양성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단면을 통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소설이 “인간을 탐구하는 보고서”라는 말을 인정하게 한다.
3. 『삼체 1부』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 447쪽
위의 소개한 강연에서 소설을 읽는 이유, ‘재미’를 확실하게 느끼는 방법을 소개했다. 장르물을 읽고 그 장르물의 법칙을 따라가면 소설의 재미를 알게 된다는 설명이다. 장르물 SF 소설은 지구가 아닌 곳이 배경으로, 지구인이 아닌 인물이 등장해서 지구에서 살고 있는 인물의 군상들을 말하는 것이 특성이라고 했다.’ 로맨스 소설이나, 추리소설에 빠져 읽은 적은 있지만 SF 물은 나에겐 좀 낯설었는데 그 설명을 듣고는 SF 소설이 궁금해졌다. 해서 최근에 소개받고, 영상물로 먼저 접한 이 소설을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3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우 양이 방대한 이 책, 1권을 읽었다.
영상물로 만들어진 것을 먼저 보았더니 소설을 읽는 내내 등장인물을 연기한 배우의 모습과 겹쳐, 내 상상에 방해를 받아 당황스러웠다. 글을 읽고 나서 영상물을 보면 이 정도의 방해는 받지 않는데, 영상물을 먼저 접하니, 글을 읽으면서 내가 만들어가는 상상의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아주 드물게 글보다 더 매력적인 영상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원작 글보다 영상물이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이 소설의 경우는 방대하고 많은 이야기가 있어, 만들어진 영상물은 시간과 공간적 제약으로 실제 소설의 스케일을 담지 못했다. 하지만 영상물은 중국의 문화 혁명을 아주 자극적으로 다루어 임팩트가 있었다. 원작을 읽으니, 시리즈로 만들어 제법 인기를 끈 영상물도 잘 만들어졌음을 알았다. 특히 시작의 흡인력이 필요해서 문화 혁명의 모순을 실감 나게 구체화한 부분은 압권이다.
공상 과학 소설이라 줄거리 소개를 좀 해야 이해가 될 것 같다. 소설은 나노 기술에 저명한 과학자가 어느 날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숫자(카운트 다운)에 주목하고, 이 숫자가 탁월한 과학자들의 죽음과 연관됨을 알게 된다. 그 연관성을 따라가다 지구에 다른 우주인을 부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야기의 큰 축은, 우주인과의 접촉을 시도한 천체 물리학자 예원제는 중국문화혁명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때려죽이는 홍위병, 남편을 고발하고 살아남아, 정치적 성공을 하는 어머니, 그리고 많은 방관자 속에서 인간의 광기 끝판을 본다. 그런 광풍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견디다, 달라진 세상에서 우주인이 보내는 메시지를 감지했을 때, 인류를 향한 그녀의 복수는 시작된다. 우주의 다른 세계의 존재들에게 지구로 올 것을 원했다는 설정이다. 인류에게 복수를 결심한 상황이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지구 삼체 반란군의 시작이다. 이 반란군은 1부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지만 정작 반란군이 부른 삼체의 실체는 2부, 3부에서 언급되는 것 같다. 2부 3부를 안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나는 도덕감 제로인 우주 문명이 존재할 가능성을 100퍼센트로 보고 도덕이 있는 인류 문명이 이 우주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가? 그것이 이 연작을 집필한 이유라고” 했다. 도덕이 있는 인류를 말하기 위해 도덕을 잃었던 문화 혁명 시기를 언급했고, 그 시점이 도덕감 제로인 우주 문명을 불러 인류를 지배할 것을 요청했다고 이해했다. 1부에서는 ‘삼체’의 실체는 특정 과학자가 접속하는 게임 형태를 빌려 보여준다. 게임 속 화면에서 그들의 실체를 짐작하게 한다. 태양이 세 개인 그 공간에서 살아남는 방법인 탈수의 설정은 SF 소설, 상상이 만들어 낸 극한의 매력적 설정이다. 상상도 과학적 지식으로 논리가 정연하면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다.
소개한 강연에서 강연자가 말한 SF물 공식이 그대로 적용되는 이 소설은, 다시 작가의 말을 빌려보면 “잘 쓴 과학소설이란 제일 변화무쌍하고 제일 정신 나간 상상을 뉴스 보도처럼 진실하게 쓰는 것”이라고 했다, 작가의 말은 내가 진즉에 공상과학 시리즈물을 접했더라면 과학적 상식이나 지식이 좀 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했다. 공상 과학 소설은 재미는 물론이고 또 다른 세계의 영역이 무한정 넓어짐을 경험하게 함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소설을 통해 이 세계가 아닌 곳에 관심이 가는 것은 시리즈 소설을 읽는 매력이리라.
강애라
숭곡중학교 국어교사. 전국학교도서관모임 전 대표. 서울학교도서관모임 회원.
책을 통해 성장한 저는 책과 함께한 시간들이 소중해서, 평등하고 온기가 넘치는 학교도서관을 꿈꾸었습니다. 성찰이 있어 평안한 60+의 인생을 향해 오늘도 책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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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애라
숭곡중학교 국어교사. 전국학교도서관모임 전 대표. 서울학교도서관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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