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끌림의 색 : 블루

 

서가에 있는 책들을 분류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장르별로 나누기도 하고, 작가별로 혹은 출판사별로 구분하기도 하고, 주제별로 나누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어떤 이들은 책등 색깔로 나누어 꽂아두기도 합니다. 색색별로 나누어져 있는 책을 보고 있자니 ‘책들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요. 그 뒤로 서점이나 도서관을 갈 때마다 자꾸 눈길이 가는 그림책들이 있었습니다. 짙고 깊은 블루. 표지에서 발견한 파란색은 보이지 않는 줄로 꿰어 당기는 듯합니다. 한 권 한 권 품에 안으면 어느새 한아름 품게 되지요. 자리에 앉아 잔뜩 쌓아두고 하나씩 들여다보면 그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서서히 마음이 여유롭고 차분해집니다. 이제 블루의 이끌림에 몸을 맡겨 볼 시간입니다.


1. 『The Blue Hole』

HYUN HO 글 | 성바오로 | 2023년 | 56쪽

화이트와 블루로만 이루어진 『The Blue Hole』은 아주 정직한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의 헌사는 작품의 가장 마지막 장에 있습니다.

“삶 가운데,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었던, 혹은 보내고 있는 당신께 이 책을 바칩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작가 자신을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책일 것입니다.

어느 날 작은 구멍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구멍은 점점 커지더니 사람을 집어삼킵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아래로 끌어당깁니다. 알 수 없는 손길에 잡힌 사람은 너무 짙어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느 곳에 갇힙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무력감을 경험하게 되지요. 이 그림책에는 눈을 뗄 수 없어 한없이 바라보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온통 짙고 어두운 블루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막 힘든 시기를 보냈거나 보내고 있다면 이 장면이 끌어당기는 힘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 짙음과 깊음은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을 키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장을 더 넘겨 만나는 눈부신 흰 빛은 그런 마음을 녹여줍니다.

작가 현호는 자신이 우울함에 빠졌을 때 느꼈던 감정과 그것을 이겨냈던 시간을 그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울은 슬픈 동시에 아름다운 이면이 있는 감정 같다고 했습니다. 가끔 찾아오는 우울이라는 감정을 마주하기 힘겨울 때 펼쳐볼 수 있는 그림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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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들개』

조원희 글 | LOB | 2024년 | 176쪽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오랜 세월 동안 변해왔습니다. 서로 경계 없이 어울려 살기도 하고, 서로의 영역을 지키며 살기도 했지요.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필요에 의해 형성되는 도구적 관계에서 서서히 감정을 나누는 반려의 관계로 변화해 가면서 말도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애완’동물이라는 말 대신 ‘반려’동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말도 있습니다. 바로 ‘견주’라는 말입니다. ‘반려’는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반면, ‘주인’은 위계적이고 종속적인 말이라서 서로 어울리지 않게 들립니다. 주인의 입장으로 반려동물을 대해서 일까요? 자신의 반려동물을 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들리니 말입니다.

조원희 작가의 <들개>는 반려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개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들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온통 파란색으로 디자인된 표지는 제목조차 눈에 잘 띄지 않는 형압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오로지 개 한 마리가 어딘가를 향해 급하게 뛰어가고 있습니다. 손으로 더듬어 제목이 있는 곳을 만져보면 마치 숨겨진 덫처럼 느껴집니다. 부디 잘 피해 가기를!

표지를 넘기면 글 없는 그림이 펼쳐집니다. 그 중 유독 파란색이 눈에 띕니다. 목줄, 공, 케이지, 빗자루. 파란색은 억압과 폭력을 상징합니다. 버려진 개는 보호인 줄 알았던 억압을 피해서 야생으로 들어갑니다. 다른 들개 무리를 따라 깊은 산으로 가는 개의 뒷모습을 보며 책장을 닫습니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반려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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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다는 다시 바다가 된다』

김영탁 글, 엄주 그림 | 안온북스 | 2025년 | 75쪽

이 그림책을 읽으면 어렸을 때 손가락 끝 힘을 조절하여 한 장씩 빠르게 넘기면 책 끄트머리에 그려 넣은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던 놀이가 떠오릅니다. 그렇게 하면 바다가 물결치는 게 보이고 주인공이 어른이 되어 가는 모습이 보일 것 같거든요. 김영탁 작가의 글은 시 같아요. 따라서 써보면 생각보다 길지만요. 엄주 작가가 그린 바다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진실 되게 느껴져요. 또 장면마다 빠지지 않는 바다의 파란색은 안정을 느끼게 하지요.
섬과 섬을 가로질러 펼쳐진 바다가 한 사람의 묵묵한 힘으로 잠시 육지가 되더니 조용히 다시 너른 바다가 되었어요. 저항하지도 않고 굴복하지도 않고 그저 처음부터 바다였고 여전히 바다라고 하듯 말입니다. 소녀는 또 어떤가요? 다시 바다가 되어버린 바다를 보고, 이제 어떻게 해야 자신의 섬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고 있다며 섬 너머를 보기 위해 했던 일을, 이제는 익숙해진 그 일을 튼튼한 팔과 다리로 해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오죠. 그게 다예요.

이제는 호기심보다는 그리움을 품을 줄 아는 어른이 된 소녀는 변화한 섬을 그대로 두기로 합니다. 그 너머를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다고요. 다른 이가 있으니까요. 세상은 그렇게, 어린 나에서 나이 든 나에게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흘러가는 것이니까요.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남겨두는 일,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조금은 그리워하며 지내는 것. 다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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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루의 설계도』

로버트 헌터 글·그림, 맹슬기 옮김 | 에디시옹 장물랭 | 2017년 | 56쪽

땅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꽃은 어떻게 피어나는지, 바다는 왜 어느 때는 깊고, 어느 때는 얕은지, 왜 바닷물은 가까웠다가 멀어지는지, 왜 저 밝은 빛을 뿜어내는 존재는 나타났다가 서서히 사라지는지. 이 수많은 질문에 대해서 인류는 신화로 답했습니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때로는 잔혹한 이야기로 말이죠. 과학의 발달로 신화는 거짓처럼 들리지만 여전히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세상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기 때문이죠. 파란색 표지로 돌아온 『하루의 설계도』는 신화입니다. 이 세상을 만든 존재의 집착과 그 세상을 지켜야 하는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장면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색에는 작가의 집착과 이기심이 서려 있습니다. 또 밀물과 썰물, 일출과 일몰에 대해서 태양을 향해 일방적인 사랑에 빠진 지구의 슬픈 사랑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사랑을 한 가지 색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인지 한 장 넘길 때마다 화려한 색감에 눈동자는 바빠지죠.

이 그림책이 특별한 이유는 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색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잉크를 조색해서 만든 특별한 색을 사용했어요. 무려 4가지 색을요! 또 재쇄 때마다 이 네 가지 별색을 이용해서 표지를 바꿨어요. 초판은 영국판과 같은 노란색, 2쇄는 한국만의 판본으로 붉은색 표지를, 너무도 아름다운 파란 표지는 프랑스 판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3쇄 표지랍니다. 또 표지를 코팅을 하지 않아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낡도록 했습니다.

이런! 그러고 보니 이 그림책은 그 자체로 사랑에 빠진 이들의 이야기군요. 이야기와 그림, 인쇄와 제작 그리고 이 책과 사랑에 빠질 독자를 기다리는 순간들 모두 가요. 그래요, 여러분은 지금 사랑에 빠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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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그림책 연구모임

어른그림책연구모임 – 유수진
그림책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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