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문학적 서사와 상상

 

나이에 따라 현실 인식이 다를 것이다. 청소년 시기에 중요했던 것이 그 시기가 지나면 그다지 중요하거나 절대적이지 않기도 하다. 같은 시기라 해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인식의 차이도 있다. 문학적 서사를 접하는 독자의 경우,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생각으로 그 서사를 받아들이는 차이는 있지만 많은 이가 공감하고 사랑하는 문학작품은 문학적 서사가 주는 간접 경험이 매력적으로, 공감으로, 때로는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적 서사를 통해 한 번만 살 수 있는 인생이 풍부해진다. 문학적 서사인 소설책이 주는 매력은 내가 살고 있는 현재는 물론이고 살지 않았던 시대, 그리고 살 수 없는 미래까지 아우르고, 작가의 진정성과 다양성으로 내 삶이 확장되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한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장강명 ∣ 문학동네 ∣ 2015년 ∣ 188쪽

‘그믐’은 음력으로 그달의 마지막 날을 일컫는 말로, 그날에 관찰되는 달의 모양으로도 불린다. 그믐달은 새벽녘이 되어야 뜨고, 해가 먼저 떠올라 달의 형체를 보기가 어렵다. 어원이 까무러지다 사그라들다의 옛말인 ‘그믈다’의 명사형에서 왔다고 하니 마지막 날을 표현한 작명으로 적절하다.
이 책은 제목과 내용이 너무 잘 어울려 서늘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시간을 한 방향으로 한 번밖에 체험하지 못하는 인간은 과연 진실에 접근이 가능하기는 한걸까?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과연 사실일까? 아니 사실을 넘어 그 진실은 이 책에서서 말하는 패턴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계가 있는 인간들이 과연 극복할 수 있는 걸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게 한다. 이렇듯 문학적 서사가 주는 창의성과 기발함은 머리를 때히고 현실보다 더 선명하고, 거기에 상상이 더해져 진실에 접근하는 근사한 방법 같다. 나는 이 책의 서사가 너무 창의적이고도 섬세하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한계를 나타내서, 문학적 서사가 가져오는 울림을 경험했다.
두껍지 않은 분량으로 이야기 속의 또 하나의 소설이 존재하고, 여러 사람의 시각으로 풀어져 있어 처음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지만 퍼즐처럼 맞추어지는 재미가 있다. 만약 시간을 넘나든다면 못다 한 사랑도, 왜곡된 기억도, 후회스러운 과거도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겠구나! 이건 정말 굉장하다. 하지만 이게 가능하다면 인간은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살아갈까? 아니면 자신에게 유리한 인생으로 살아갈까도 궁금해진다.
이 책 마지막 부분에 다시 이어지는 ‘우주 알을 품는 사람, 즉 죽은 자식이 죄가 없다고 믿고 주인공을 따라다니다 결국 그를 살해하는 어머니는 자신이 그리 믿는 자식의 과거를 알게 된다면? 살인자라고 믿고 죽인 가해자가 결국 피해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되돌아볼까? 아니면 더 극렬하게 부인하게 될까도 상상하게 된다. 현실은 선명하지도 않고 해석의 여지도 많은데 이것이 문학적 서사가 되면, 윤색되고 가려진 진실들을 드러내는 데 유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넘나드는 주인공이 죽인 아이의 어머니에 의해 본인이 살해될 것을 알고도 그녀의 살인이 정당함을 세상 사람에게 알리려고 거짓을 준비한다. 괴롭힘을 당해 저지른 살인, 죽은 아들에 대한 맹목적 믿음, 가해자와 피해자, 사실들이 진실과 함께 이 서사의 뒤에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우주알을 품은 그 어머니의 행보가 궁금하다.


#그믐 #그믐달 #30일 #시간 #한방향의시간 #살인 #괴롭힘 #가해자 #피해자 #학교폭력 #우주알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 364쪽

학교 도서관을 사랑하는 선생님들과 20년 넘게 모임을 하면서 당연하게 서점을 방문할 기회가 많았다. 오래전 이 책 속의 서점 같은 곳을 간 기억이 떠 올라 매우 친근하게 읽었다. 주택가 사이에 아래층을 서점으로 꾸민 그곳은, 만약 내가 이런 집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집을 서점으로 꾸밀 생각을 했을까 하며 둘러보았다. 책을 좋아하거나 관심 있으면 당연하게 서점에 관심이 가지만 서점을 내 일터나 내가 해야 할 업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이런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쉼이 있는 공간에서 책과 함께 안식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대단한 이야기가 없어서인지 그냥 내 모습이고, 내가 만나는 이웃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서점이라 함은 책이 있고, 책을 사고 파는 공간으로만 인식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책이 주는 위안만큼 쉼이 있는 공간으로도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그냥 이 책에서 책을 빼고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 서점을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달리다가 멈추어선 공간으로 그곳을, 어떤 사람은 자신을 찾아가는 공간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배려받고 치유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자기만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느끼는 안정감만큼 편안하다. 서점 주인인 영주의 멈추어 서기 전 삶이, 내 삶의 어느 시기와 닮아있으며, 바리스타 민준의 성장이 힘겨워 안쓰럽다. 그래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응원하게 된다. 이 서점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물고기들처럼 유영한다. 이곳엔 배려가 있고, 사랑도 있고 적당한 거리 두기로 인한 쉼이 있다. 바다라는 숨쉬기 어려운 공간에서, 목에 차오르는 숨참이 없고, 모두 부레라도 달린 듯 자연스럽게 물에 유영하게 한다.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고 부럽다. 소설을 써볼까 하고 시작되었다 말하면서 서점의 이름이 ’휴‘로 시작되고 구체적으로 그려 놓은 것은 없지만 영화<키모네 식당>과 <리틀 포레스트> 같은 분위기는 정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어떤 글을 쓸 때보다 즐거웠다 말했다. 미치도록 부러운 말이다. 단 한 번이라도 소설을 쓰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경험인 줄 알 것이라고 나는 장담한다. 어쨌든 이 소설은 작가의 이런 부러운 고백이 아니더라도 너무 자연스럽고 그 흐름이 유연하다. 나도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런 편안한 몸놀림을 경험했다. 책이 더 좋아지고 서점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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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을 읽다』

전국국어교사 모임 ∣ 휴머니스트 ∣ 2021년 ∣ 152쪽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에 나오는 김첨지의 기막힌 삶을 모르는 한국인은 드물다. 교과서에 실리는 대표적 현대소설이고, 소설을 공부할 때, 소설적 장치들을 배울 때도 빠지지 않고 예를 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100년도 더 전의 이야기지만 표현이 생생하고, 1920년 서울(경성)이 그려져, 김첨지가 인력거를 끌고 다녔던 곳의 흔적을 찾아 문학 답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현실과 문학적 서사로서 위 두 소설을 다루다가 시대를 달리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1920년을 살았던 작가 현진건은 자신이 사는 현실을, 문학적 서사로 보여준다. 해석이야 다양하게 할 수 있지만 자전적 소설이라 말하는 지식인이 무기력한 삶의 모습도 보여주고, 성저십리에 살던 경성의 인력거꾼(하층민)의 비참함(돈이 없어서)을 역설적인 제목을 넣어 각인시키기도 했다. 식민지 치하에서 살아가야 했던 현실의 처참함을 소설 속 다양한 주인공들의 일상으로 강렬하게 고발하고 지금 우리는 그 어떤 증거 자료보다 강렬하게 그 당시를 이미지화 해서 각인한다. 작품이 주는 최대의 매력이다.
이 책은 현진건의 대표작 5편을 골라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구성상의 특성, 인물들의 성격, 갈등, 그리고 의미를 국어 교사의 눈높이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교과서 작품이라 이미 알고 있었던 어른들이 다시 한번 작품과 읽어도 좋을 해석이다. 현실의 모습이 많이 다르지만 문학적 서사를 통해 작가가 말하려는 바는 생각보다 닮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세 권의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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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애라

숭곡중학교 국어교사. 전국학교도서관모임 전 대표. 서울학교도서관모임 회원.
책을 통해 성장한 저는 책과 함께한 시간들이 소중해서, 평등하고 온기가 넘치는 학교도서관을 꿈꾸었습니다. 성찰이 있어 평안한 60+의 인생을 향해 오늘도 책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