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오는 바람이 전보다 순해졌습니다. 볕이 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연둣빛 어린싹이 티끌 하나 없이 말간 얼굴로 나와서 봄이 오고 있다고 부지런히 소식을 전하고요. 계절이 틔워 올린 어린싹은 봄이 온다고 알리는 편지일까요? 봄을 전하는 배달부일까요? 몇 개의 글자로 혹은 사진과 영상으로 단숨에 전해지는 디지털 세상의 선명한 봄소식과 달리,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연둣빛 어린싹에는 우리를 설레게 만드는 주문이 들어 있나 봅니다.
대부분의 소식이 편지로 전해지던 시절에는 먼 남쪽에 살던 분이 먼저 온 남녘의 봄소식을 핑계로 안부를 물어오곤 했었지요. 요즘은 손 편지도, 그런 편지를 전하는 반가운 배달부도 귀해졌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주고받던 설렘을 떠올리며, 오늘은 편지와 관련된 네 권의 그림책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예쁜 마음을 편지글로 담은 『리디아의 정원』, 섬마을에 편지를 배달하는 『우체부 코스타스 아저씨의 이상한 편지』, 그리운 할머니께 아름다운 풍경과 일상을 전하는 『풍경편지』, 행복을 그리는 화가 이수동이 전하는 80통의 위로 『토닥토닥 그림편지』입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네 권의 그림책을 보며 편지를 받는 수신자의 기분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리디아의 정원』
데이비드 스몰 그림, 사라 스튜어트 글|시공주니어|2000년|36쪽
시골집에서 원예사 할머니와 부모님과 화목하게 살고 있던 리디아는 아빠의 실업과 함께 엄마의 바느질 일감마저 끊기자 1년 남짓 도시에서 제과점을 하는 삼촌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소녀는 낯설고 어려운 현실에서도 꽃을 심을 소망으로 “가슴이 너무 떨립니다!”하며 가족에게 사랑이 담긴 편지를 쓰고, 삼촌 모르게 예쁜 음모를 꾸미지요. 짬 날 때마다 꽃씨를 심고 가꾼 화분들로 단장한 옥상정원을 공개하여 삼촌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려는 어여쁜 마음으로 말입니다. 리디아의 마음이 가족의 시름도 너끈히 덜어줄 것 같습니다. 꽃이 만발한 비밀 장소에 삼촌을 초대한 리디아는 가슴이 터질 듯 기뻐합니다. 리디아를 위해 꽃으로 뒤덮인 케잌을 내미는 무심한 듯 속정 깊은 삼촌의 모습도 참 인상적이고요. 마지막 날 기차역에서 덩치 큰 삼촌이 작고 여린 조카를 품에 안고 이별하는 장면은 코끝을 찡하게 합니다. 리디아의 그림과 시, 크리스마스 선물 꽃씨 카달로그, 할머니의 수선화 알뿌리, 씨앗 봉투, 모두가 편지이지요. 더구나 표정도 말도 없는 삼촌이 만든 꽃케잌 편지는 천 번을 웃으신 것만큼 특별합니다. 이 봄에 우리의 마음을 어떤 편지로 전해볼까요? 리디아를 만나면 귀띔해줄 것 같습니다.
책은 1998년에 칼데콧 아너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그림작가 데이비드 스몰은 ‘월 스트리트 저널’ 등에 삽화를 그렸고 ‘뉴욕 타임스’의 서평 전문 기자로도 활동했습니다. 노란 계열의 밝은 색감과 스케치하듯 가벼운 연필 선의 그림이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글 작가 사라 스튜어트는 자신의 글에 남편 데이비드 스몰의 그림을 많이 소개하는데 현재 뉴욕 타임스에서 어린이책 서평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우체부 코스타스 아저씨의 이상한 편지』
안토니스 파파테오도울로우 글, 이리스 사마르치 그림|길벗어린이|2020년|48쪽
딴딴딴 딴딴딴 딴단단단 딴!하고 시작되는 크시코스의 우편마차라는 곡이 있습니다. 마차가 달려가는 느낌이 잘 표현되어 첫 소절을 들으면 장면이 절로 그려지지요. 우체부 코스타스 아저씨도 편지를 마차에 싣고 달려갈까요? 책 두어 장을 넘기다 보면 골목 사이마다 촘촘히 박혀있는 발자국이 말발굽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어요. 고래등 모양의 외딴 섬에 동화 속 장난감 같은 집들이 오밀조밀 붙어 있고, 그들을 품은 황토색 마을이 옅은 하늘과 짙푸른 바다 사이에서 아늑하게 놓여 있습니다. 전화도 이메일도 없는 섬사람들에게 세끼 밥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이들의 소식이고 코스타스 아저씨에게 편지를 전하는 것이 그것과 같았어요. 반가운 소식은 백 개라도 가볍게, 무거운 소식은 한 개라도 함께 무거워하며 50년간 한 통도 빠짐없이 편지를 전하고 이웃들과 희로애락을 나누었는데, 그날은 편지와 함께 자신의 퇴직 소식을 알려야 하는 슬픈 날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집마다 사람이 없어서 편지를 문틈으로 겨우 끼워놓고 쓸쓸하게 앉았는데, 가방으로 날아든 나뭇잎을 좇아 눈길을 돌리다가 수취인 없는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어요. ‘황금 모래 해변’이라고 적혀있는. 주소만 적힌 편지를 들고 길을 나서는 코스타스 아저씨와 숨바꼭질하듯 사라진 마을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우체부의 마지막 날이 재밌고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독자의 마음에 촉촉한 잎새 하나 내려앉을 예쁜 그림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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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사진』
김규희 그림, 이채린 글|옐로스톤|2022년|56쪽
《풍경편지》는 한 소년이 ‘보고 싶은 할머니께’ 편지를 쓰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가족과 함께 구름 섬을 건너 미국으로 간 소년은 모든 게 낯설었지만, ‘정이 든 곳이 고향이다.’라는 할머니의 말씀처럼, 이국의 낯선 풍경들도 점점 익숙해지면서 시간이 갈수록 좋아하게 됩니다. 소년은 새로운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사귀고,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닙니다. 그러다가 소년은 하늘에 고운 노을빛이 물들면 노을 위로 보고 싶은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렇잖아요.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재밌는 것을 보았을 때 함께하고 싶은 소중한 사람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처럼요. 소년은 일상의 경험들을 그리운 할머니께 전하기 위해 손으로 꾹꾹 눌러 편지를 씁니다. 멀리 계신 할머니께 소년이 본 경이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전하려고 엄마가 그린 풍경화에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아 다정한 말들로 편지를 씁니다.
이 책의 그림은 여행지에서 만나는 엽서처럼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아름다운 풍경화입니다. 그림을 그린 김규희 작가는 미국에서 2년간 살면서 풍경화를 그렸고,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이채린 작가가 그림에 입혔다지요. 그래서인지 그림책 《풍경편지》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여행에서의 아름다운 기억과 풍경, 그리고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소중한 사람을 독자의 마음으로 불러오나 봅니다.
『토닥토닥 그림편지』
이수동 저|아트북스|2010년|240쪽
그런 날 있잖아요. 평소와 별로 다른 것도 없는데 괜히 짜증스럽고 심통이 올라오는 날, 열심히 했는데도 이상하게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 잘못한 것 하나도 없는데 괜히 주눅 들고 눈치 보게 되는 그런 날 말이에요. “오늘 정말 수고했어. 다 잘될 거야.”라며 누군가 다가와 따뜻한 미소로 토닥여주면 응어리졌던 마음도, 풀리지 않았던 하루도 좋아질 것 같은데, 오늘따라 축 처진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복을 그리는 화가 이수동은 위로를 담은 그림편지 80통을 그림책 《토닥토닥 그림편지》로 엮었습니다. 이 책은 힘든 하루에서 발견하는 작은 즐거움, 가족에 대한 감사, 자연에서의 위로, 연인에 대한 애타는 마음 등 살아가면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KBS 드라마 「가을동화」의 주인공(송승헌)이 그렸던 그림의 실제 화가로 알려진 그는 일상의 한 부분을 그만의 따뜻하고 포근한 감성으로 그려냅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잔잔한 격려로, 따뜻한 위로로 아픈 마음을 토닥여주지요. 《토닥토닥 그림편지》는 간결하고 정제된 형태와 그만의 담백하고 아름다운 색채, 그리고 삶의 경험에서 나온 짧고 명쾌한 글로 복잡한 마음을 정화하고, 한 자락 쉬어갈 여유를 갖게 합니다. 그의 다정한 그림편지는 친구처럼, 다정한 연인처럼 이제 괜찮아질 거라고 따뜻한 위안과 위로를 주는 것 같습니다.
어른 그림책 연구모임
어른그림책연구모임 – 김정해, 오현아
그림책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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