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을 향해 걸어가느라 힘들었던 젊은 시절의 고됨이 싫었음에도 나이가 들면서 중심부에서 멀어져 변방으로 내몰리는 소외감은 당황스럽다. 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 지역, 가장자리가 되는 쪽이라는 의미의 ‘변방’이라는 단어가 다가온 것은 중심부를 벗어나야 보이는 것들의 주는 여유와 작지만 큰 행복이다.
20년을 감옥에서 보내신 신영복 선생님은 ‘변방’을 ‘지리적으로는 국가와 국가의 만남, 문화와 문화의 만남의 자리고, 중심과 주류로부터 멀리 떨어져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사유의 공간’인, ‘자기 성찰’의 다른 이름으로 말씀하셨다. 여기에 공간과 시간을 달리하면서도 역동하는 ‘변방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모아보았다.
『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 돌베개 ∣ 2012년 ∣ 144쪽
신영복 선생님이 쓰신 글씨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그 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글을 묶은 책이다. 서예와 서화와 서와 수필로 많은 공감과 위로를 주고 있는 선생님의 글씨가 있는 곳은 대부분 지역적으로는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주류 담론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닌 변방에 위치하고 있다.
땅끝마을 해남 송지초등학교 ‘꿈을 담는 도서관’ 현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봉하마을 고 노무현 대통령 묘석을 끝으로 8개의 글씨와 그 글씨가 있는 곳의 의미를 풀어가고 있다. 선생님은 변방을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있는 곳이라 했고 그 변방을 찾아가는 길을 ‘멀고 궁벽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 각성과 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있는 곳’이라 했다.
신영복 선생님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은 신영복 선생님이 말하는 변방을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그리고 예술적으로 다양하고도 깊게 풀이한다. 인류사는 언제나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어왔음을, 성찰적 관계론으로 겸손과 절제와 함께 설명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스스로를 끝없이 뒤돌아봐야 하는 시간들이 늘어난다는 것이고, 그런 시간들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였고 나아감이었다. 지혜란 세월이 지나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의 불화(不和), 시대와의 불화의 극복으로 설명하신 신영복 선생님 말씀이 아니라도 불화를 끝낸 편안함이 있다면 나이가 들어가는 데서 오는 선물이지 싶다.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 문학동네 ∣ 2020년 ∣ 336쪽
통통 튀는 작품들로 사랑받는 정세랑 작가의 소설인 이 글은 제목만 보았을 때는 시선이 사람 이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와이로 사진 시집을 갔던 심시선이라는 여성으로부터 비롯된 가족에 대한 이야기, 『시선으로부터』는 참 멋진 작명이다. 심시선 가계도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20세기를 살아내느라 전사가 되어야 했던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딸과 아들과 사위와 남편 그리고 손자 손녀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심시선 여사는 사진 한 장 들고 하와이로 갔다.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그 시절, 어차피 여성에게는 배움의 기회는 없었다. 배움의 기회를 잡느라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감내했고, 끝없는 성찰을 하면서 중심부의 권력과 맞섰다.
중심부에 가보지 못했지만 중심부를 열망하지 않았고, 다름이 부딪치는 변방에서 끝없는 소용돌이를 자신의 에너지로 사용했던 여인, 20세기 여성의 억압을 거부한 심시선은 자기답게 사는 것을 보여줌으로 그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자식들에게 남겨준 어머니, 할머니였다. 화가로 작가로 어머니로, 세상과 남자들이 주는 구속과 억압을 거부하며 그림으로 글로 그 무엇보다 삶으로 자신과 살아온 세상을 표현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역시 20세기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고국(중심부)에서 살지 못하고 하와이와 뒤셀도르프(변방)를 견디고 돌아온 심시선의 계보를 잇고 있다. ‘창조의 원천이 깊은 열등감’이라는 문화평론가의 말에서 열등감의 의미를 되짚는다. 눈만 뜨면 합리화하려고 하는 인간에게 성찰이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성찰은 그 자체가 빛나는 달성이다”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는 이 소설은 망자가 된 심시선 여사가 그의 딸과 아들과 그리고 자라나는 그의 손녀 손자에게 영원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당신의 수식어』
전후석 ∣ 창비 ∣ 2021년 ∣ 239쪽
쿠바 혁명의 한 축을 담당한 임은조씨의 일대기를 조명한 다큐 <헤로니모>를 찍은 저자는 재미 변호사이다. 그가 어떤 인연으로 임은조씨를 알게 되어 그의 일대기를 주목했는지 밝히고 있는 이 글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일컫는 단어인 ‘디아스포라’라는 낯설 단어를 독자들 곁에 가져온다.
각자가 다른 이유로 조국을 떠났지만 끝없이 물었을 자신에 대한 정체성, 다수가 아닌 소수, 중심부가 아닌 주변인으로의 고민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 여전히 우리가 해야 할 고민이다. 다수가 정해 놓은 편견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의식적으로 규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말은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국에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나의 수식어는 무엇일까? 그 수식어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 혹시나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정하진 않았는가 되물어 보고 싶다.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나의 수식어를 만드느라 힘이 들었다면 한 발만 뒤로 물러나 보자. 나이가 들어간다는 편안함은 그 비켜섬을 받아들여서일까? 작가가 나에게 묻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 당신의 수식어는?
민족이나 인종, 언어와 지리적 경계를 초월하여 다양성과 혼합성을 받아들일 때 확장된 자아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이 ‘디아스포라’의 정신이라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세계시민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는 생각도 해본다.
강애라
숭곡중학교 국어교사. 전국학교도서관모임 전 대표. 서울학교도서관모임 회원.
책을 통해 성장한 저는 책과 함께한 시간들이 소중해서, 평등하고 온기가 넘치는 학교도서관을 꿈꾸었습니다. 성찰이 있어 평안한 60+의 인생을 향해 오늘도 책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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