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인간 심리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작품, <죄와 벌>은 어둡고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극한까지 몰아가며 그 상태를 들여다보는 인간 심리 보고서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인격, 정의, 명분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가치들을 이야기한다. 특히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살인을 결심하고 저지르는 과정보다는 죄를 지은 후, 긴장과 두려움과 공포를 겪는 심리적 과정이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얼마간의 돈만 있으면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범죄를 저지르지만,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압박은 오히려 훔친 물건들을 쓰기는커녕 숨기기에 급급하게 한다.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환각 상태에서 괴로워한다. 이 과정에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죄의식과 자기합리화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스스로 멀어져간다. 3년 만에 만난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증오심을 보이며 험상궂게 대하고, 자신을 보살펴주는 친구 라주미힌에게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짜증을 낸다. 그리고 자신을 의심하며 조여오는 예심판사 포르피리에게는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도발한다. 심리적 불안 상태를 넘어 자기혐오에 빠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그림책이 있다. 일본작가 후쿠다 이와오가 쓰고 그린 《빨간 매미》. 국어 공책을 사러 문구점에 간 주인공 이치는 빨간 지우개를 훔치고 엉뚱한 공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 후 이치가 겪는 심리 상태가 자세히 그려진다. 동생 유미와 수영장에 가기로 한 약속을 어기며 오히려 동생에게 소리치고, 친구 고우와 공원에 가서는 매미를 잡아 날개를 잡아떼기도 한다. 저녁 목욕 시간에는 신나게 떠들며 노는 동생을 부러워하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한다. 물건을 훔쳤다는 죄의식 때문에 일상이 모두 어그러진 것이다. 그날 밤, 문구점 아줌마가 이치의 주머니에서 날개 없는 빨간 매미를 꺼내는 꿈을 꾼다. 지우개를 돌려주고 싶지만 무섭고 창피해서 돌려줄 수 없다는 이치는 엄마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함께 문구점으로 가서 지우개를 돌려주며 사과한다. 그 과정을 통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치. 이치와 라스꼴리니꼬프가 겪는 일련의 과정들이 겹쳐 보인다. 《죄와 벌》 마지막 부분,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이 죄를 털어놓았을 때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소냐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한다. 에필로그 부분에서 시베리아 유형을 따라간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이 라스꼴리니꼬프를 변화시키고 잘못을 참회하게 하고 자유롭게 한다. 이치에게 있어 엄마의 역할을 라스꼴리니꼬프에게는 소냐가 한 것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책 두 권, 1000페이지에 달하는 《죄와 벌》과 40페이지에 불과한 《빨간 매미》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자기혐오라는 벌을 받고 잘못을 깨닫는 참회의 과정을 거쳐 용서를 구하는 행위의 어려움. 두 권의 책은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며 자세히 보여주고 있어 공감을 이끌어낸다.
장지원
그림책, 신화, 철학, 예술을 배우고 나누는 인문공동체 책배여강 회원.
시니어 문화예술 프로그램 ‘인생 그림책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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