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연 소설가가 전하는 60+ 독서이야기




‘문인들이 전하는 60+독서 이야기’는 10명의 문인들이 각자 자신의 시선으로 60+독서를 바라본 시리즈입니다.


소설가가 소설이 싫어지기도 한다.

 

소설가가 소설이 싫어지기도 한다. 중국의 소설가 한소공이 그랬다.
“나는 소설을 쓴 지 10년이 넘었지만 점차 소설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읽는 것조차 싫어졌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소설은 줄거리가 중심이 되는 전통적인 소설을 말한다. …모든 개인은 각기 둘, 셋, 넷 혹은 이보다 훨씬 많은 인과의 실마리가 교차하는 가운데 생활하고 있다. 또한 각각의 인과관계 외부에는 또 다른 사물과 물상이 존재하여 우리 삶에 불가결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인과의 그물 속에서 소설의 주된 줄거리가 누리는 패권(인물, 줄거리, 정서를 모두 포함하여)이 무슨 합법성이 있겠는가?”1)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사람이 아니라 ‘말’이 주인공인 획기적인 소설을 써냈으니 <마교 사전>이다. 마교는 중국 호북성의 작은 농촌 마을이고, 소설은 그 마을사람들이 쓰는 말 중 115개의 단어를 소개하는 사전 형식이다. 이런 소설을 쓴 이유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세계일 뿐 그 이상일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를 떠나서는 이 세계를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무슨 의미냐면, 우리에게 있어 언어에 의존해서 만든 세계가 거의 바로 세계 그 자체라는 뜻이다.”2)

“이 사전을 본뜬 소설에서 각 표제어는 문이고 입구이다. 그것을 통하여 생활과 역사로 들어갈 수 있고, 각 단어 뒤에 숨겨진 이야기로 들어갈 수 있다.”3)




이 눈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소설을 통해 들어간 ‘마교’라는 세계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한 마디로 이렇다. 혹은 저렇다고 규정할 수 없는 세계이다. 평생 남들의 떳떳치 못한 비밀을 병적으로 수집하면서도 ‘자신은 언제나 본분에 맞게 살면서 자기 몫이 아닌 것은 벼 한 포기도 손대지 않았던’ 인물 ‘중기’는, 병든 아내를 돌보느라 심히 쪼들려 고기 한 덩이를 슬쩍 했다가 발각되자 자결하고 만다. 그는 계속해서 본분을 지켜야 했을까, 아니면 ‘잘못된 일을 저지르면서도 멀쩡하게 돈만 잘 버는’ 다른 이들처럼 변해야 했을까? 많은 자식들 때문이겠지만 수전노에 철면피라 공히 기피 대상이었던 ‘조청’이 화자(작가 자신)가 사다리에서 떨어질 뻔한 순간 유독 깜짝 놀라 주르륵 흘린 누런 눈물, 이 눈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마을의 우두머리 격이자 비적이었던 ‘마문걸’에게 자기가 국민당에 귀순한 해, 드디어 제복 입은 관군이 되어 다른 비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게 되었다며 부하들과 축하주를 들던 그 해는 오늘날 역사 교과서에 기록된 1948년과 결코 같은 해일 수가 없다. 그 해에 그는 국민당이 이미 대륙에서 붕괴해가고 있는 줄도, ‘붉은 군대가 혁명의 승리로 기세가 충천’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국민당에 귀순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부하들 100여명의 운명을 지옥으로 돌려놓았다는 것을 그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땅 속에 묻혀있다 나온 불발탄처럼, 그 해는 수 년 혹은 수십 년 후에 갑자기 터져버렸다. 마교에서 ‘시간은 이렇게 잘못 이어져 있다.’


언어가 세계를 만들 만하다.

 

그런데 마교에서만 그럴까? 사람이 아니라 말이 주인공인 이 소설에서 사람들이, 그리고 그들의 삶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전통적인 소설 양식을 거부한 이 소설에서 오히려 소설의 힘을 확인하게 된다. 작가는 ‘화자’로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데, 수십 년 너머 시대를 오가면서 설명, 의견, 비평을 자유롭게 개진한다. 사건 발생 당시라는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작품에 원숙한 사고의 무게를 더한다. 독자로서는 이제는 중후해진 작가와 대화하기가 편하다. 충북대 중어중문학과 이선옥 교수에 따르면, 이 소설은 지금까지 작가의 “정신적 성찰 중에 이룬 가장 높은 성과이자 중국현대문학사에 있어 경전적 작품”이라고 한다.

예술에는 관례가 있다. 이 소설의 작가가 의문시했던 전통 소설 양식이 한 예이며, 평면에 그린 그림을 3차원 공간으로 인식하기로 하자거나 파도 몇 줄기 그려놓은 무대를 바다라고 하기로 하자는 식의 약속들이 그런 것이다. 요즘은 가상공간을 실제처럼 경험하게 하는 기계들도 나왔지만, 눈에 고글을 꼈다든지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로 했을 때만이 실제 같은 경험이 성립한다. 그런 관례들에 신나게 동참하다 보면, 문득 뜨악해지는 순간이 온다. 더 이상 몰입이 되지 않고, 성의를 끌어내고 싶지도 않다.

다른 한편으로는 알아야 할 것들을 웬만큼 알고 하늘이 무너져도 꼭 해야 할 말이 있던 시절을 지나, 정작 확실히 아는 게 아무 것도 없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들하고, 뿌옇고, 갑갑하다.
그럴 때도 언어 자체는 남아 있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든 비결, 다른 동물들은 모르는 비밀. 시든 논문이든 상관없고, 꼭 다 읽어야 할 필요도 없다. 언어의 힘을 느끼고, 언어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나는 얼마 전 C.G. Jung의 <연금술에서 본 구원의 관념>을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뭘 읽었단 말인가! 단어 하나하나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거의 무한소로 압축해놓은 것 같았다. 달리 말하자면, 단어 하나마다 역사와 문화를 무한대로부터 끌어당겼다. 언어가 세계를 만들 만하다.
 



 

1) 마교 사전/한소공 지음/ 심규호, 유소영 옮김/민음사 2007. 1권 120-121쪽
2) <말이 연 세계, 말을 통한 성찰> -마챠오사전의 사전체 형식이 담은 의미/이선옥/중국문학 제 94집.
3) 위 논문 157쪽에서 재인용.


오수연

오수연 소설가
소설가. 연작소설 <부엌> <황금지붕>, 장편소설 <돌의 말> <건축가의 집>을 펴냈다. 팔레스타인 현대산문선 <팔레스타인의 눈물>을 기획, 번역했고, 팔레스타인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시집 <우리는 새벽까지 말이 서성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를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