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호 시인이 전하는 60+독서 이야기




‘문인들이 전하는 60+독서 이야기’는 10명의 문인들이 각자 자신의 시선으로 60+독서를 바라본 시리즈입니다.



‘아름다운 나이다. 예순!
아름다운 나이라고 써놓고 조금은 서글프게 읽는다.’

 

아름다운 나이다. 예순! 곧 그 나이가 된다. 아름다운 나이라고 써놓고 조금은 서글프게 읽는다. 이 슬픔의 근거는 하도 복잡해서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거울을 보는 것이 불편해지는 걸 보면 늙는다는 것에 대한 서글픔이 가장 크지 않을까.

아흔인 어머니가 내 손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이고, 곱기도 하다. 참 좋을 나이야. 뭐라도 새로 시작할 나이야.” 그러나 이 말씀으로 기쁨을 누릴 나이도 이미 지났다. 그냥 나이가 더 들면 나도 저 마음일 거야 하는 정도의 생각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글픈 건 단순히 나이 때문이 아니라 뭔가를 새로 시작할 수 없다는 ‘마음 접음’에 있다. 이 ‘마음 접음’을 다시 펼칠 에너지를 얻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는 동창 모임에 몰려다니고 또 더러는 이런저런 문화센터의 프로그램을 기웃거린다. 그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시 일으키는 가장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활동이 독서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분야, 섬세한 취향에 맞춰진 책들이 연일 쏟아져 나온다. 이 엄청난 것들을 스쳐 보낸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책들을 활용하는 독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럿이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것 또한 독서활동이다.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같은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활동’

 

소설가 박상륭 선생님께서 생전에 캐나다에서 이민 생활을 할 때 서점을 경영한 적이 있다. 그 서점은 꽤 유명해져서 전국에서 자동차를 몰고 책을 사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 이 서점이 융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세계의 희귀본들을 구할 수 있는 점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을 독서클럽을 만들어주고 그 모임에 맞는 책을 추천해주었기 때문이라 한다. 본인의 관심도에 따라 독서 모임에 가입할 수 있으니 한 동네에 독서클럽의 개수는 참으로 많았다고 한다. 비슷한 연배로 독서모임을 만들어서 같은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활동은 친목도모 뿐 아니라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다. 몇 해 동안 나는 충청지역 공무원들의 독서동아리 심사를 했었다. 그들은 함께 책을 선정하고 그 테마에 맞게 여행도 하고 또 책을 만들기도 하는 다양한 활동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그 책에 대해 함께 토론하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읽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여 독서의 효과가 한층 증대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듯 독서활동이야 말로 무궁무진한 영역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그들의 발표를 심사하면서 알았다.

그런데 사실 이런 모임을 만들거나 또 참여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 독서 모임이 여의치 않다면 혼자 읽고 혼자 독해하는 것도 권장한다. 한없이 느리게 읽어도 책은 늘 기다려주기 때문이다. 밑줄을 그어놓고 유보해도 독촉하지 않는다. 한 줄만으로도 충분히 하루의 양식이 되기도 한다. 이 넉넉한 세계를 어떤 큰 비용의 지불도 없이 누릴 수 있다.


’60대 이후의 느린 삶에는 반드시 좋은 책이 친구가 되어야 한다.’

 

예순의 나이는 부모님이 곁을 떠나고 친구들도 하나 둘씩 이별을 고할 때이다. 금방 땅을 움푹 파고 들어갈 것 같은 나이를 실감하게 되면 어떤 불안함이 덮친다. 죽음이란 것은 개인사적인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의미에서 무척 슬프다. 내가 죽는 데 그 무엇이 대단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죽음은 가까이 있기도 하겠지만 또 멀리 있기도 하다. 죽음 자체에 대한 생각보다 어쩌면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삶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느낄 수 있는 책 한 권을 추천한다. 지금 내 어깨 위에 내려앉는 햇살이 얼마나 소중하며 아이들이 노란 가방을 메고 팔랑거리며 뛰어가는 저 움직임이 얼마나 신선한 것인가. 나뭇잎이 파닥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살아있음의 순간을 절절히 느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런 것들을 읽을 수 있는 이 책은 철학자 김진영의 자기애도 일기인 ‘아침의 피아노’이다. 췌장암 투병기간인 1년 동안 김진영 선생은 그 소중한 하루하루를 짧은 글로 기록했다. 살아있음의 섬세한 맥박을 그 행간에서 느끼며, 죽음을 향한 두려움보다는 살아있음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초조함과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그 순간 스스로를 어떻게 위무할 것인가도 깨달을 수 있다.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참 아름다운 시간을 누리고 있으며 죽음이란 지금의 사랑을 다른 세계에 전하러 길을 떠나는 것이라는 믿음도 생긴다. 이 책은 짧은 기록이므로 분량에 대한 부담도 없다. 뿐만 아니라 나도 이런 글을 써볼까 하는 욕구도 생겨서 내 몸에 와 닿는 모든 기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김진영 선생의 책을 소개하다보니 시집 읽기도 꼭 권하고 싶어진다. 시를 가까이 하는 삶이 주는 여유와 여백의 가치를 강조하고 싶다. 최근 1년간 나는 50플러스라는 기관에서 강의를 했다. 그들은 50대 이후의 삶을 재설계하기 위해 학생의 좌석에 앉았다.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어서 종종 그들에게 좋은 시집을 권한다. 한 권의 시집에 수록된 60여 편의 시들. 그 속에 녹아있는 삶의 오목과 볼록 현상을 짚어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또 미래를 바라보기도 한다. 시집을 읽는 성숙기의 그들, 한 행 한 행을 온몸으로 느끼며 감탄하는 그들은 참 아름답다.

이렇듯 따끈한 동백차 한 잔을 올려놓고 시의 행간을 비워보는 것은 일상을 참으로 여유롭게 한다. 행과 행 사이의 침묵을 건너는 동안, 잠시 이 세상의 말을 멈추고 환희에 찬 다른 세상을 꿈꾸어 보게 된다. 매일 새아침을 맞이하듯이 날마다 새 구절을 만날 수 있는 독서의 힘에 놀라며 나는 60대 이후의 느린 삶에는 반드시 좋은 책이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한 권의 책을 읽지 않고 놓친다는 것은 어쩌면 어떤 신선한 아침 하나를 놓치는 것이 아닐까.

천수호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현재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단국대 강사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매계문학상 수상